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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지혜 Aug 27. 2021

유리고양이를 위한 츄르 만들기 : 약

우울증에 빠진 네 곁을 지키는 법

  안녕, 고양이들! 잘 있었어? 그루밍은 잘들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니? 과학적으로 검증된 치료법이라 여기는 고양이도 있고, 웬만해선 의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고양이도 있겠지.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고양이부터 몇 번 먹다 말았거나, 꾸준히 복용해온 고양이까지 다양할 거야. 우리 집 고양이는, 과학 고양이야. 약을 믿고 잘 따르는 편이지.


  아침에 고양이가 비척비척 씻고 나오면, 나는 물 한 컵과 약을 준비해. 핑크 젤리 위에 약과 비타민을 올려주고, 물 잔을 건네지. 고양이는 한두 알씩 약을 삼켜. 약을 타 오면 날짜를 헷갈리지 않도록 일주일치 약통에 넣어줘. 그럼 알아서 챙겨 먹기도 해. 잊지 않고 꼬박꼬박 먹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고.


  약을 먹기 시작하고도 약 4개월 동안은 안정되지 않았던 것 같아. 적정량의 용량을 찾기 위해 헤매고, 부작용 없는 복용법을 찾기 위해 애썼어. 약을 먹는다고 당장 나아지지 않더라. 당연히 하이 하게 기분이 치솟지도 않아. 약을 먹은 바람에 잠들지 못하고 괴로워한 적도 있지. 메스껍고 불편하다고 끄욱끄욱하는 모습이 참 속상했어. 다행히 지금은 자리를 잡은 것 같아. 더 이상 메스꺼워하지도 않고 기분도 비교적 일정해. 우울해, 우울해, 하고 말하던 고양이의 하울링이 조금 잦아들었어. 속상해하는 집사를 위해 말을 삼키는 건 아닐까, 걱정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지금은 덤덤하게 말하지만 실은 무척 두려웠어. 정작 고양이는 괜찮은데 집사인 내가 그랬지. 우습지? 말했잖아, 나 그렇게 좋은 집사가 아니라고. 이미 다 검증된 약이고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다르니 초조해지더라. 특히 복용량을 찾아가던 초창기에 그랬어. 처음엔 한 알이던 약이 차주엔 두 알이 되고, 자꾸만 용량이 늘어나는 거야. 용량은 늘어나지, 그래도 고양이는 밤마다 울지. 약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어. 게다가 고양이는 자꾸만 약을 더 늘리고 싶어 하지 뭐니.


  적정량을 찾도록 옆에서 지켜봐 주고, 약 복용의 효과를 곁에서 객관적으로 살펴줘야 하는 게 집사의 몫이야. 그런데 나도 모르게 겁이 났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었나 봐. 약을 자꾸 늘리는 건 마냥 안 좋게 느껴지고, 어쩌다 약을 안 먹고도 괜찮은 날이 있다면 그렇게 넘어갔으면 싶었지. 매일 꼬박꼬박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몰랐어. 나도 모르게 약에 '의존'하는 게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 아무리 이론적으로 우울은 나약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약은 아주 효과적인 치료법이다, 되뇌어 봐도 소용없었지.


  우울한 스스로를 알아채고 병원에 다니는 고양이는 나약하지 않아. 누구보다 행복해질 의지가 있는 고양이지. 누가 권하기 전에 스스로 갈 수도 있고, 누군가의 조언이나 간청이 있어야 할 수도 있어. 뭐가 되었든 현재 직접 정신의학과 의사와 마주 앉을 수 있다면 아주 용맹한 고양이지. 그렇다면 집사, 걱정 말고 고양이를 지켜봐 주는 게 어떨까?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기분에 누구보다 겁먹은 건 고양이일 거야.


  집사들! 집사인 너도 마음속 깊이 고양이 털을 숨기고 있는 것 알아. 그래서 얼마나 불안한지도 잘 알아. 병원에 다니는 거야 이해한다지만, 이상하게 약 용량이 자꾸 느는 것 같고 먹어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지? 모두 적응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용량이 느는 건 적정한 수준의 복용량을 찾아가느라 그래. 상태가 악화되어서 약을 늘리는 게 아니야. 의사도 무턱대고 고양이가 원한다고 약을 무한대로 늘려주지도 않아. 몸에 축적된 약이 은은하게 효과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자. 윤 나는 새카만 털을 쓰다듬어주면서.


  대신 우리도 힘들면 고양이에게 말할 수 있어! 그래야 해.

  그래야 집사도 오래도록 츄르를 만들 수 있거든. 나도 가끔 고양이 품에 안겨 호소해. 나 좀 보살펴 줘, 하고. 그럼 또 얼마나 용맹하게 가슴을 내어준다고. 그럼 짜르르하게 마음이 충전돼. 츄르를 만들 힘을 얻는 거지. 내가 이런 말을 해서 괜히 더 힘들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은 되도록 하지 말자. 고양이도 대개는 알고 있더라. 집사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얼마나 집사를 사랑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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