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동과 디지털단지, 빌딩과 벌집촌 표류기

4. 금천구 가산동

by 고생끝에골병난다


우리는 누가 죽은 것처럼 울었다. 유년 시절 단짝이던 민형이는 부모님이 이혼을 하면서 어머니의 고향인 경주로 전학을 갔다. 며칠 전 그에게 연락이 왔다. 서울에 직장을 구했다고 했다. 초등학교가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던 민형이가 어느덧 직장인이 되었다니, 반가우면서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민형이는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의료 장비 업체에 취직을 해 서울 자취방을 알아보고 있었다. 얼마 뒤 소식이 들려왔다. 부동산 중개 어플인 ‘다방’을 통해 값싼 원룸을 구했다고 했다.



가산동, 준비된 입지


서울에 살아도 금천구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금천구는 1995년이 되어서야 구로구에서 분리되었다. 인구와 면적이 워낙 작기도 하고, '구로공단'의 존재감이 강해서 여전히 금천구 일대를 구로로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가산디지털단지의 위상은 얘기가 다르다. 금천구와 구로구 일대에 조성된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는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산업단지이다. 지금은 여의도, 종로, 강남과 함께 서울 4대 업무지구로 분류되는 곳이 가산디지털단지 일대이다.


산업화가 이제 막 시작하던 시절, 섬유·봉제 산업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공단이 기획되었다. 하단에 첨부한 사진은 도시 데이터 전문가 신수현 씨의 프로젝트 '포켓 서울'의 결과물이다. 상공에서 바라본 서울은 생각보다도 지독한 산지이다. 그나마 있는 평지들은 종로나 영등포처럼 이미 시가지가 들어섰거나, 군 시설인 경우가 많았다. 당시 정부가 공단 입지로 고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평지가 구로 가산 일대였을 것이다.


사진 출처: 신수현(@SINCE) 'X' 계정


이 지역은 마치 공단을 위해 준비된 입지 같았다. 교통 측면에서도 경인선·경부선의 결절지일 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 중 영등포 부도심 권에 속해 있어 수도와의 교류도 용이했다. 안양천을 끼고 있어 공장 용수를 공급받거나 폐수를 처리하기에도 좋았다. 철도, 강, 평지, 저렴한 지대를 기반으로 공단이 들어선 영국 리버풀의 사례와도 비슷하다.


벤처의 수도


가산디지털단지 일대의 전경


구로공단의 첫 번째 전성기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였다. 당초 이곳은 구로공업단지로 명명되었으나, 제조업의 쇠락과 90년대 후반 IT 붐의 영향으로 변화를 맞는다. 김대중 정부는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정보통신을 집중 육성했다. 이 과정에서 쇠퇴한 구로 공단 일대도 디지털산업의 메카로 변모할 기회를 맞는다. IT 벤처붐 당시 설립된 벤처기업들은 주로 테헤란로 일대에 자리 잡았으나, 강남의 급등하는 임대료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대안으로 부상한 곳이 쇠락하던 구로 가산 지역이었다. 당시 정부 지원과 저렴한 지가를 토대로 많은 아파트형 공장이 공급되던 구로공단의 조건이 벤처기업의 필요와 딱 맞아 떨어졌다. 저렴한 임대료와 편리한 교통을 무기로 삼아 IT업체들이 빠르게 이 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재래 산업의 쇠퇴로 공동화 현상을 보이던 산업 단지를 혁신함으로써 도심 공업 지역의 재생을 시도한 것은, 1984년 일본 가와사키사가 공동화된 도심지 공업 지역을 첨단 산업으로 재생시킨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였다. 7호선 개통 이후 가산동 일대의 발전은 더욱 빨라졌다. 구로 가산 일대로 통근하는 인구 수는 여의도를 넘어섰다. 2020년 9월에 발표된 서울플랜에 따르면, 가산동은 대림동과 묶어서 서울의 미래 광역중심지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서울도시계획에 따라 서남부의 부도심으로 육성될 계획이다.


가리봉동: 이주민의 마을



내성적인 아이였던 민형이에게 부모의 이혼과 낯선 도시로의 이사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민형이는 초등학생 시절의 일화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경주로 내려간 이후, 전학 이전의 추억을 곱씹는 것으로 일상을 보냈다고 한다. 큰 도로를 따라 세련된 오피스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민형이를 따라 들어선 골목의 분위기는 영 딴 판이었다. 민형이가 사는 빌라는 저층 주택을 따라 형성된 낙후된 동네 중심에 있었다. 중국어로 된 간판이 한글보다 쉽게 눈에 띄었다.


좋은 교통과 저렴한 지대는 도시의 이주민들이 터잡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1960년대 초반 구로 가산 일대는 서울 중심가 재개발로 인해 도심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난민촌을 형성해 살았다. 당시 이 지역은 원주민이 거의 없던 변두리였다. 구로공단이 개발되면서는 가리봉동을 중심으로 일명 ‘닭장집’과 ‘벌집’이 들어서며 노동자 밀집 지역으로 변모한다. 그러나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머물던 ‘닭장집’과 ‘벌집’은 시간이 흐르며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조선족으로 채워지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 가리봉동이 옌벤조선족마을로 급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이렇게 구로 일대에 많은 중국동포가 살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친척 초청 또는 여행, 공무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에 들어온 중국동포들은 입국 후 한국에 그대로 남아 건설 현장, 식당 등에 취업하게 된다. 옌벤에서 온 중국동포 노동자들은 서울에서 가장 값싼 방을 구할 수 있는 가리봉동 일대로 자연스럽게 몰려들게 되었는데, 이것이 구로 가산 일대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중국동포 밀집 거주 지역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이다. 심지어 가리봉동에는 옌벤 지명을 상호로 사용하는 식당과 식품점, 노래방 등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서울의 옌벤조선족마을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법무부는 2002년 한일월드컵 대회를 앞둔 3월 12일 ‘불법 체류자 종합 방지 대책’을 발표하고 불법 체류자 자진 신고 기간을 설정하였다. 자진 신고자에 대해서는 2003년 3월 31일까지 출국을 유예해 준다는 정책이었다. 이것은 월드컵을 앞두고 테러 방지를 위해 불법 체류자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한 목적이 컸는데, 어쨌든 법무부에 공식 집계된 불법 체류자 27만 6000명 중 93%인 25만 6,000여 명이 자진 신고를 해서 준합법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인 15만 1000명이 신고했고, 그 중 중국동포가 10만 명을 넘게 차지하였다. 이렇게 신고를 한 외국인과 중국동포들은 2003년 3월 말까지 자진 출국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구입한 비행기표 또는 배표와 함께 여행증을 소지하고 오면 여권에 출국 유예 기간을 찍어 주었다. 이 조치는 가리봉동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1990년대 초부터 가리봉동에 거주하는 중국동포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불법 체류 상태였기 때문에 거주민을 통계로 집계할 수 없었고, 중국 식당 등도 뒷골목에 자그마한 규모로 생겨 외부에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2년 법무부 구제 정책이 발표된 이후 가리봉동에는 결혼 또는 친척 초청 등으로 이주해 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옌벤 출신 중국동포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옌벤의 고향 지명을 딴 식당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동포 노동자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한국인들이 중국동포를 상대로 노래방을 개업하여 성업을 이루었다. 또한 국제전화방, 핸드폰가게 등이 중국어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열게 되었다. 그 후 이곳은 중국동포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생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김용필.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굽이굽이 골목을 따라 들어선 친구의 집은 가리봉동의 낡은 원룸이었다. 여기서 1년만 살고, 돈이 모이면 오피스텔로 이사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아직 이삿짐을 다 풀지 못한 그의 방은 몸을 접고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았다.


바깥에서는 외국인들의 말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인터넷에서 구로구청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댓글에는 '당신은 딴 짓 말고 범죄도시 가리봉동이나 치워라'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영화 <범죄도시>는 가리봉동 일대를 조선족 범죄자들이 활개하는 소굴로 묘사했다. 이질적인 존재를 경계하는 것은 종족 동물인 인간의 본성이지만, 선진 도시 서울이 외국인과 이주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은 더 성숙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회학자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이 차별과 혐오의 기반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대중문화는 복잡성을 제거하고, 특정 인종, 성별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사람들이 타자를 이해하기보다는 반응적인 혐오를 학습하게 만든다. 혐오의 표적이 되는 대상은 익숙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이다. 자기불안을 외부집단(소수자, 이민자 등)에 투사하며 해소하려는 욕망이, 대중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려는 지배층의 목적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렇게 한국에 사는 중국 동포들은 '짱깨'라 불리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수십년동안 이곳에서 일하고 가족을 꾸리며 살아온 사람들도 졸지에 '범죄 도시'의 주민이 되었다.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가산동 일대는 언제나 서울의 오늘을 만드는 이들의 터전이었다. 구로공단의 여공, 외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 그리고 꿈을 찾아 서울에 돌아온 친구 민형이까지. 무슨 일을 해서라도 생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청년들의 공간이다. 오랫동안 가산동, 가리봉동, 구로동 일대에는 산업화와 세계화를 거치며 서울의 가치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살아왔다. 이들을 불량주택에 몰아넣고 '으스스하니 제발 좀 치워버리자'며 비난하는 것은 어딘가 부당하다는 생각이다. 가산동 뿐 아니라, 어쩌면 서울시가 디아스포라의 도시 아닌가. 천만 명의 서울사람들 중에서 고향이 서울인 사람은 드물다. 지방에서 상경한 서울 시민은 모두 이주 노동자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언덕에 터를 잡고 서울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다. 가리봉동의 이주민들도 우리의 일부일 뿐이다.


“<다방>에 다 있다.” 집만 빼고.



박민규의 소설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서울의 좁은 고시원 방을 전전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 “귓속의 달팽이 관 같은 고시원의 복도 끝 방에 살았던” 주인공의 회고는, 고시원으로 대표되는 산업화 이후의 불량 주택 생활을 보여준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도시민들은 기숙사와 원룸, 반지하와 옥탑방에서 생활한다. 이러한 임대 산업은 평당 시세가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원룸'을 만들어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청년들은 방 한 칸에 살면서도 매달 50만 원씩, 1년에 600만원을 월세로 내고 있는데, 30억 부동산 가진 사람 종부세가 그것보다 적으면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꾸준히 민간의 임대 시장을 육성하는 식으로 도시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일본의 사례를 모방한 것이다. 임대사업은 고도화되었고, 청년들은 이제 내 친구처럼 '다방' 같은 어플리케이션으로 방을 거래한다. 청년들이 애용하는 ‘다방’과 ‘직방’이라는 플랫폼의 명칭은 은연중에 1인 가구의 주거실태를 드러낸다. 지금도 고향을 떠나온 청년들은 ‘집’이 아니라 ‘방’에 산다.


수도권으로 올라와 대학이나 직장을 다니는 청년 중 운이 좋은 이들은 기숙사 방에서 살 수 있다. 부모가 보증금을 마련할 능력이 있다면 원룸에서도 살 수 있다. 목돈이 없을 땐 불편을 감수하며 친구와 방을 공유해 살기도 한다. 제대로 된 집은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다. '갑을고시원 체류기'의 주인공처럼, "방이라기보단 ‘관’ 같은 곳"에 살기도 한다. 구로공단 여공들이 살던 '벌집'의 시대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고시원에 사는 청년들은 몸을 반으로 접은 채 잠을 이루려 애쓴다. 옆방 거주자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을 수 있는 원룸형 하숙을 청춘의 보금자리로 삼는다.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불경기에 주거 빈곤 청년들의 사정은 더욱 열악해진다. 어쩔 수 없이 집단 거주 시설을 선택하는 청년들은 취약한 보건 환경에 내몰리기도 한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 가난한 신도들이 생활하던 신천지의 비좁은 공동 주거 시설과 구로구의 콜센터가 집단감염의 온상이었던 것은 계층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형도 시인은 그의 마지막 시 <빈 집>에서 어두컴컴한 집 안에 커다란 사랑을 가두었다. 불 꺼진 방에서 스탠드 하나 껴놓고 사랑에 젖어 휘갈긴 편지들, 상대를 생각만 해도 솟는 슬픔, 불안함, 열망, 밤을 지새우고 문득 고개 들어 창문을 보면 둘러싸여 있는 안개들까지. 그의 청춘은 집을 무대로 사랑을 키웠다. 집은 그저 비바람을 피하는 장소가 아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인생의 한 순간을 영위하는 곳이다. 가산동 오피스 단지의 불이 꺼져도 친구의 삶은 고시원에서 이어진다. 자기개발을 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아늑함을 느끼며 휴식을 취해야 하는 곳이 집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쓰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청년들에게 낭만과 열정을 주문하기 전에, 집다운 집을 얻을 수 있는 환경 먼저 보장해야 한다. 청년들의 ‘집’이 좁고 비싼 ‘방’에 그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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