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호선에서의 라스트댄스
1호선의 여정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만히 창밖을 본다. 부평역과 송내역 사이 보이는 1기 신도시의 성냥갑 아파트들을 지난다. 온수역에서는 녹지와 소형 공장이 섞여있는 서울 외곽의 풍경을 지나친다. 개봉역 남쪽으로는 광명뉴타운이 막 지어지고 있다. 구로역부터 영등포까지는 오래된 공단과 연립주택이 빽빽히 들어섰다. 이제 여의도 남쪽을 지난다. 노량진에서 63빌딩이 보여야 내가 서울에 들어왔구나 싶다. 수도권의 기본 골격은 1호선을 따라 발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호선은 경기도 베드 타운과 접경지의 그린벨트, 뉴타운과 낡은 부도심을 거쳐 도심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전개과정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노량진과 용산역 사이, 한강을 넘어가는 구간이다. 지지부진한 일상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여의도의 뾰족한 스카이라인은 도시 경관만의 상쾌함을 제공한다. 남영과 서울역 사이, 성근 오피스 건물 너머 언덕을 따라 덕지덕지 들어선 단독주택들이 보인다. 전철이 지하로 들어갈 차례가 되면 노인 인구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동생이 한약 냄새가 난다며 가장 싫어했던 구간이다. 어떤 어르신들은 싸우기도 하고 갑자기 친해지기도 한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다. 회기역과 노원역 사이를 지날 때 지하철의 인구 구성은 다양해진다. 통학하는 대학생, 오피스텔촌에서 자취하는 청년, 등산 가는 할아버지와 노원의 아파트 주민들, 부대로 복귀하는 군인, 동대문 일대 상권에서 일하는 외국인들. 내 생애 주기는 항상 이들 중 하나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대체로 이즈음 기차에서 내린다. 이제 기차는 도봉을 거쳐, 경기도 북부의 논밭 사이 솟은 신도시 아파트를 지날 것이다. 국경의 북쪽에 가까워지면 1호선의 긴 여정이 끝난다.
"움직이는 할렘가"
요즘 사람들은 1호선 하면 ‘빌런‘. ‘광인’ 같은 키워드를 떠올린다. 인터넷에서 1호선은 ‘움직이는 할렘가'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나는 그런 1호선을 평생 타고 다니는 팔자다. 조부모의 집도 청량리이고, 나는 경기도 부천송내역 근처에서 태어나 구로구, 동대문구를 오가며 살았다. 대학을 1호선 라인으로 다니던 친구들이 모인 채팅방이 있었다. 이름은 '1호선에서의 라스트댄스'였다. 남은 인생 안 풀리면 1호선에서 장사를 하자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날 전철에서 있었던 괴로운 일을 공유하곤 했다. 보통은 홍대에 갈 것처럼 차려입은 사람이 신도림에서 내릴 줄 알고 기다렸는데 광운대까지 가더라, 자리에 오줌 냄새가 지독했지만 운 좋게 앉은 이상 견딜 수밖에 없었다는 등의 신세 한탄이 주를 이뤘다.
1호선은 1960년대에 기획된 지하철이다. 산업화가 시작되며 서울 인구는 폭증했으나, 1968년 전차가 사리지며 서울 버스는 포화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서울역에서 출발해 종로를 거쳐 청량리역에서 끝나는 최고령 지하철이 기획되었다. 당시에도 지하철이 수도권 인구 집중과 지대 상승을 오히려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지하철 건설은 세계적 추세'라는 이후락 주일대사의 주장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내 최초의 지하철 건설이 시작되었고, 이후 경부선(서울~수원), 경인선, 경원선(청량리~성북)을 전철화해 1호선과 직통하기로 한다. 50년 전인 1974년 8월 15일, 1호선의 긴 여정이 출발했다. 향후 메트로폴리스가 될 '서울권'은 그렇게 싹을 틔운다.
원도심을 지나는 최초의 전철은 도시와 함께 늙어갔다. 1호선은 기술과 자본이 부족했던 시절 지어진 탓에 대부분의 구간을 지상에서 운행한다. 서울역-청량리역 구간을 제외하면 1호선은 지하철이 아니다. 지상철이 지나는 구간은 기차 소음과 분진의 영향으로 지대 상승이 제한된다. 주변의 도시가 단절되며 슬럼화되기도 쉽다. 우수한 대중교통 접근성과 낮은 지대의 조합 덕분에 자본금이 부족한 사람들이 지상철 주위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 탓에 선거철마다 1호선을 지하화하겠다는 공약이 반복되기도 하지만, 14조원에 달하는 예산과 공사 기간을 생각하면 실현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는다.
1호선을 이해해야 서울이 보인다
지상철이 오래된 동네를 지나며 형성된 낮은 지가의 역세권. 1호선의 특성은 이렇게 완성된다. 그러니까'1호선 광인' 담론은 계급성을 띄고 있다. 타지에서 '마계 인천'이나 '이부망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계층성을 무시하는 언사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생애주기와 계층에 따라 주거지역이 달라지는 현상에 고령화와 인간 소외가 맞물리며 '1호선 광인'도 등장했다.
나는 이 1호선을 타고 인생의 3분의 1 쯤 보내는 것 아닌가 한다. 정말 빌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역에서 '예수님이 빨갱이를 때려잡을 것(?)'이라 소리치는 악에 받힌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울리면 꽤 오싹하기도 하다. 하지만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들이 '마계'로 뭉뚱그려지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하다. 1호선 동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조명하고, 1호선 라인의 진짜 풍경을 담는 작업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서울은 생존을 위해 모여든 외지인들의 도시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서울살이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내는 역경에 가깝다. 1호선을 탄 사람들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서울의 도시 구조와 역사성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황현산 선생은 저서 『밤이 선생이다』에서 이동 중인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찌푸린 사람들'이라는 산문을 썼다. 이동은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시간과 공간에서 지지부진하게 힘을 소비하는 일"이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주변을 사유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평생 몸을 실어온 지하철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은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끼워넣고 출퇴근 길을 오가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침해 당하고 가끔은 멀미도 하면서, 어쩔 때는 친구나 연인, 가족을 만나러 가면서, 우리와 함께 나이 들어온 1호선 동네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