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를 추모하다

1. 청량리와 제기동

by 고생끝에골병난다


경동시장 르포르타주


청량리역에서 내리면 롯데캐슬이다. 63빌딩보다 높다는 사실을 홍보하려는 듯 이름 끝에 ‘65’를 붙인 그 빌딩은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1호선을 타고 대학을 다닐 때, 경의선을 타고 군부대를 오갈 때. 건물은 세련된 입면을 뽐내며 높아지고 있었다. 르포르타주 연구차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에 내렸다. 막상 완공된 아파트 단지를 지나보니 아파트는 후락한 건물 사이 어색하게 끼어 있었다. 네이버 지도에는 나올 리 없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건축가 유현준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서울이 슬럼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마 여기가 그 슬럼일 텐데. 재개발이 끝나면 서울은 어떤 도시가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경동시장을 지났다.


시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청량리에서는 노인의 생명력 같은 것이 느껴졌다. 가난하게 살아온 끝에 볼품없이 늙어버린 노인. 그 아들 세대의 바람처럼 쉽게 치우기는 힘들어 보였다. 살아있는 생명만이 낼 수 있는 냄새가 풍겼다. 오히려 깔끔하게 정비된 뉴타운 일대가 죽은 듯 보였다. 그러니까 청량리는 끈질지게 살아있는 시끄러운 노인의 얼굴을 한 동네였다.


시장 뒤편 골목에 들어서니 그야말로 판자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조금씩 비가 내렸다. 골목 사이로 청과물 썩은 냄새가 새어 나왔다. 나는 1기 신도시에서 태어났다. 내가 자란 부천 중동 아파트 단지는 나와 동갑이다. 낡고 지저분한 거리 풍경에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다.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인도의 뒷골목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시끄럽고 낯선 노인들. 신축 아파트를 얻기 위해 투표 정당까지 바꾸었던 아버지가 얼마나 이 동네를 떠나고 싶었을까 싶었다. 잿빛 거리 끝 모퉁이를 돌면 제기동 할머니 댁이 나온다. 명절이면 이 동네에 오기가 그렇게 싫었다. 할머니댁 바로 뒤 켠에서는 철거가 시작되고 있었다. 동네가 곧 힐스테이트로 바뀐다는 정보가 돈지 오래다. 주민이 사라진 동네는 관리되지 않은 흔적이 역력했다. 시장 바깥 재개발 촉진 지구는 말그대로 슬럼이 되어있었다.



“625 때. 625 때니까 얼마나 오래된 거야 그러니까. 저기 피난 전에 고랑포가, 이제 개성 가기 전에, 거기가 할아버지 고향이야.” 할머니(81세)에게 제기동 집의 역사를 묻자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갔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북한 고랑포다. 한국전쟁 피난민으로 서울에 도착한 부부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청량리에 도착했다. 그 아이가 그날 방에 누워 계시던 나의 할아버지다. 피난민 가족은 거처를 얻기 위해 아무 집이나 문을 열어보았다. “여기가 다 전쟁터라서 이 집 저 집 다 시체만 쭉 있더래요. 그런데 이 집만 시체가 없었다는 거야." "지금 이 집이요?" "어. 그래서 이 집에 와서 그냥 살았어. 그냥 무허가 집이야. 말하자면 아주 옛날 한옥도 아니고 그냥 개화집이야. 그런 집에서 이제 사는 거야. 내가 시집왔을 때부터 이 집은 그 집이야.”


할머니 댁이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있었는지 몰랐다. 물론 1973년에 한번 다시 지어진 적이 있다. 청년 시절 할아버지는 “야방”, 그러니까 밤에 건물을 지키는 일을 하며 집이 지어지는 과정을 곁눈질하셨다. 그리고는 직접 재료를 사서 집을 새로 지으셨다. 그렇게 빨간 벽돌 제기동 할머니 댁은 지금 모습이 되었다. “개화집은 없애고, 그리고 여기(거실)가 마당이었고, 여기가 이렇게 기억자로 된 집이었어. 근데 여기(거실)는 요만큼 이제 장독대. 여기서 옥상에 올라가고, 거기 장독대가 있었고 그렇지.”


전쟁 직후 피난민 가족은 그야말로 도시 빈민이었다. 더구나 할아버지가 막 9살이 되었을 때 가장이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의 형제들은 깡통을 주어 미군 부대에 팔았다. “얘기 들어보면 진짜 가슴 아파.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부잣집 딸인데, 할아버지 보는데 울었다는 얘기도 있고. 미군 부대에 가면은 미군들이 밥을 버린다네. 그러면 그냥 갔다가 먹었대. 먹을 게 없어서.” 미군부대와 깡통이라니, 매년 할머니댁을 찾으면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직업이 있니 일거리가 있니 전쟁 끝나고 나서. 아무것도 없지.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졸업 못 했어. 근데 자기가 독학을 하고 동생을 가르쳤어. 그러다가 선풍기 회사에 다니면서 동생들을 다 학교를 보냈어. 그래서 소방관이 된 아현동 할아버지는 아직도 할아버지한테 잘해. 이번 추석에도 너희 주라고 용돈 30만원 주고 갔고, 너는 안 줬나?”


시집을 오기 전 할머니는 경기도 안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할머니의 기억은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골 아가씨들이 그냥 먹고 놀잖아. 나라에서 교육을 시켰어. 그러니까 동네 아가씨들을 넷씩 데려다가, 그 학교에서 자고 먹고 300명을 교육을 시켰어. 거기서 진짜 별걸 다 배웠어. 뜨개질하는 거, 가사하는 거 요리하는 거.” 할머니의 기억을 정리하자면, 개발독재 시기의 인력 육성 사업은 성별과 지역에 따른 역할론을 공고히 하는 식이었다. 당시 근대 기획의 일환으로 설립된 여성 기숙학교가 있었다. 마침 글을 읽을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그 기숙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나의 할머니는 그 기숙학교의 반장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렇게 만났다.


‘새색시’가 된 할머니는 경동시장에 도라지를 팔기 시작했다. 당대에도 청량리 일대는 청과물 도매가 활발했다. “시집 오니까 시어머니가 소일거리로 도라지를 까는 거야. 내가 새색시인데, 시어머니가 도라지 까는데 안 깔 수 있었냐? (웃음) 아침이 되면 같이 깐 도라지를 내가 팔아. 근데 너희 아버지가 나이 들어서 말하는 거야. ‘엄마 고생 많이 하고, 도라지도 팔면서 저들 공부 가르쳤다’라고, 고맙다고 그러는 거야.” “아버지가요?” “그러게. 술 먹으면 그래. ‘우리 엄마 고생 많이 했어’ 그래. 큰 장사는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 공부 가르치고 학교 들어가는 건 다 그걸로 해결했 어. 여기 지금 방이 3개인데 여기 월세 방 놔서 쌀 사 먹고, 도라지 팔아서 반찬 다 사 먹고, 애들 학교 대주고.”



그때부터 살던 제기동의 이웃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 친구 네 명만 남아있다. 후손들은 집을 관리하기보다는 팔아서 나누어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을의 구성이 바뀌었다. 중산층이 된 가족들은 외곽 신도시로 이사를 가고, 역 근처 구시가에는 새로운 빈곤층이 자리잡았다, 다세대, 다가구 주택을 임대 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상에는 한국인이, 지하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산다.


슬럼이 된 청량리 일대는 재개발 압력에 시달린다. 뉴타운 광풍부터 오세훈 서울시의 ‘모아 타운’ 정책까지, 할머니의 제기동 동네도 어김없이 아파트 사업 부지의 물망에 오른다. “그냥 그 집에서 살아 여기는. 왜 이사를 해. 여기 ‘모아주택 사업’ 하라고 했는데 다 안 해. 여기 사람들 다 월세 받고 살아. 방 하나에 40만 원씩. 우리도 이걸 놓으면 50만 원 받을 거야. 그걸로 생활비를 하기 때문에 모아타운도 다 반대야. 지금 오세훈이가 서울 시내에 다 모아타운으로 17층을 하라는데 여기는 다 안 해.”


이미 재개발이 시작된 무허가 주거 지역은 홍릉을 관리하는 문화재청과 서울시청이 공동으로 소유한 부지이다. 소방관이 된 작은할아버지가 필지를 매입한 탓에 할머니 댁은 뉴타운 사업지에서 제외되었다. 할머니는 그 일을 다행으로 여긴다. “아파트 만든다 그래도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이제 네 아버지한테 ‘나는 이제 저기 모아주택 안 한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평생 이렇게 조그만 집에서만 살 거냐’고 따지는 거야. 그래서 하라는대로 신청서를 썼지. 그런데 여기 사무실도 없어졌어. 35%가 동의를 해야 하는데, 그 35%도 없나 봐. 청량리역 앞 아파트도 24평 전세가 6억이래. 내 지인이 2억이 부족해서 남동생 보고 돈 좀 꿔달라 그랬대. 우리 동네는 모아타운 포기했어. 이사 비용은 현대건설이 주지만, 돈을 더 내야 들어갈 수 있어. 그럼 내가 어느 아들 보고 돈을 달라고 그래. 안 내고 편하고 살지. 내가 젊어서는 큰 집이 부러웠어. 지금은 이 집이 좋아. 청소를 조금 하니까. (웃음) 몸 아파 죽겠는데. 이것도 못하고 잘 때가 있어.”


도시의 정체성은 한번 설정되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청량리의 구조에도 관성이 있다. 교통과 유통의 중심인 원도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고, 노회한 임대 사업자가 생계를 꾸린다. 시대에 떠밀려 모여든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가족을 꾸리고 기억을 일구며 살아간다. 시간이 흘러 이곳이 아파트가 되어도 그들은 동네로 돌아올 수 없다. 내쫓고 철거한 골목에는 아빠의 흔적이 남아 있을 공간도 없다. 할머니의 회고는 전쟁과 빈곤, 근대화와 세계화의 시간을 꿰뚫는다. “이사는 안 가. 이 집 사고 할아버지는 시내 공장 나와서 굴곡이 많았어. 다니다 놀다 그랬지. 그러니까 내가 막 뛰어다니면서 일했어. 이 집 마당에서 너희 아빠 뛰어노는 걸 보고 무당이 그랬지. 여기 살면 아들이 잘 된다더라. 근데 그대로 됐잖아.” 모여든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청량리는 늙어갔다. 볼품없는 철거 구역의 노인처럼. 이유가 무엇이든, 나이든 도시는 떠나기를 거부하는 중이다.


미움 받는 노인의 삶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어느 사이 골목이 어둑해져 있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무기력하게 나부끼는 재건축 현수막과 살아있는 경동시장이 대비되었다. 청량리의 역사는 미움 받는 노인의 삶처럼 이어지는 중이다. 정신없게 달리다 보면 챙기지 못하는 것들이 생긴다. 병이 나기도 한다. 청량리는 급격한 성장과정의 결과로 탄생한 손 하나 넣을 틈 없는 동네였다. 자문해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여전히 앞만 보고 달리는 서울은 가난했던 성장기의 그늘을 치워 버리고 싶어한다. 바쁘게 생겨난 그 동네를 다시 아파트로 덮느라 바쁘다. 한 번도 가난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자식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려 버둥대다 못나게 늙어버린 그 기억은, 청량리라는 동네의 형상으로 아직 있는데 말이다.


살아있는 도시의 정체성을 죽이고 아파트로 덮으려는 오세훈 서울시의 정책이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더 시간이 흐르면 동네가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 모른다.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골목은 소멸할 것이다. 낡은 도시가 정비되고, 도시가 확장하며 주민들이 다른 곳에 자리 잡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삶은 다음 세대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동네가 자연사 한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추모해야 하는가? 상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소외된 노인에게 다시 관계를 선물해줄 수도 있고, 자연사할 때까지 지켜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무언가를 미리 추모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네의 늘그막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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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