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로와 광화문: 5.18과 세월호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그 머나먼 / 진은영)
광화문의 기억
사회학과 도시학을 통섭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사회학 공부를 하다보면 '이걸 공부해서 뭐가 되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피터버거는 '이 세상은 인형극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렇구나. 이해했어. 이제 난 어쩌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까지 공부를 미룬 끝에 시험을 봤다. 벼락치기로 피폐해진 정신을 달랠 겸 반나절이라도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다. 그럴 때 찾는 곳이 광화문이다. 쾌청한 하늘 아래 고궁과 빌딩, 골목 사이를 걷다 보면 먼 나라로 여행을 온 것 같다.
유년 시절부터 광화문에는 좋은 기억이 많았다. 이 근처로 직장을 다니던 아버지는, 주말 당직을 설 때면 나를 데리고 출근하셨다. 나는 교보문고나 텅 빈 회사 건물을 떠돌며 시간을 때우다 아버지와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와 처음 뮤지컬을 본 곳은 광화문 광장의 세종문화회관이었다. 2014년 크리스마스였다.
이듬해 겨울에는 촛불집회에 참여하느라 꼬박꼬박 광장을 찾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어른이 되어 살아갈 세상은 괜찮은 곳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광화문은 어린 시절의 주말, 문화생활, 집회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여전히 광화문을 좋아한다. 진은영 시인의 글처럼 머나먼 곳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샹젤리제와 광화문
서울 한복판이지만 종로에 오면 여행을 온 것 같다. 단지 일상에서 멀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유럽으로 여행을 가면, 보통 도시 경관을 보러 다닌다. 군 적금을 모아 파리에 다녀온 적이 있다. 언제나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권력이 조성한 웅장한 공간이었다. 성당과 궁전은 물론이고, 에팰탑 또한 민주주의라는 통치 체제의 산물이다.
광화문 일대와 비슷한 샹젤리제 거리는 원래 루이 14세에 의해 투일리 궁의 정원길로 조성되었다.개선문은 나폴레옹 1세가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했다. 개선문 아래로 펼쳐치는 샹젤리제 거리는 프랑스 왕정 권력의 시각적 연출물이다.
19세기 중엽,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에게 대대적인 도시 개조를 지시했다. 위생 개선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정치적 통제를 목적으로 한 재개발이었다. 오스만은 밀집된 지역을 철거하고 직선적인 대로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군대의 신속한 투입으로 봉기 진압이 간단해졌다.
저소득층 거주민들은 외곽으로 강제 이주 당했고, 도시 중심부는 상류층의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60년대 청계천의 철거민들이 상계동과 봉천동, 광주대단지로 밀려났고, 80년대 올림픽을 앞두고 또다시 부천으로 밀려난 서울의 역사와 비슷하다. 도시의 외관은 통일된 건축양식과 질서정연한 거리로 구성되어, 권력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권력의 중심 광화문
광장은 지나간 시대의 모든 자원이 투입된 질서정연한 공간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비일상적 감각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광화문 역시 오래된 권력의 공간이었다. 조선 초기 광화문 광장은 '육조 거리'라 불리며 한양 도성의 핵심으로 기능했다.
동아시아의 도시설계에서는 도시의 중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주작대로'가 서양 도시의 광장 역할을 수행한다. 성리학 관념을 토대로 도시의 중앙 정북쪽에 궁궐을 두고 남쪽으로 넓은 길을 내었다. 이 형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건 당나라 시대의 장안성이다. 조선에서 이 역할을 수행한 곳은 육조거리였다. 육조거리에는 이조·호조·예조 등 주요 관청이 좌우에 늘어서 왕권을 뒷받침했다. 광화문 앞 넓은 거리에서는 임금이 행차하거나 국가의 중요 의례와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평민들이 양반을 피해 다니던 뒷골목은 말을 피하는 골목, ‘피맛골'이라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 앞 한복판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다. 일제는 광화문 중심부에 거대한 총독부 청사를 세워 조선 왕궁을 가렸다. 청사 앞 광화문 거리는 일본이 도쿄 심벌인 은행나무 가로수를 심어 개조했다. 조선의 옛 정치 중심지는 총독부 주최 행사와 열병식이 펼쳐지는 식민 통치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 들어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그렇게 내 세대가 기억하는 ‘광화문’ 광장의 이미지가 탄생했다. 세종대왕 동상 뒤로 펼쳐진 고궁의 고풍스러운 전경을 보면 민족적 고양감이 차오른다. 하지만 학부 시절 교수님은 여전히 광화문 광장이 인위적으로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총독부 건물이 서있던 서울의 풍경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기억한다. 이 철거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조선 왕조에서 찾으려 한 통치술의 일환이기도 했다. 어두운 역사가 담긴 건축물을 무작정 철거한 결정에는 지금도 찬반이 엇갈린다.
한국전쟁 중 광화문은 폭격으로 훼손되었으나, 군부 독재 시기 압축성장 과정에서 콘크리트로 복원되었다. 당시 서울시는 광화문 거리 입구에 커다란 철골 아치를 설치하였다. 대부분 "질서와 안정 속에 국가 발전 이룩하자"나 "국민화합 이루어 정의사회 이룩하자"라는 선전성 문구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해외 순방을 떠날 때나, 해외의 정치인이 한국에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 환영 문구도 이 아치에 새겨졌다. 또한 일제 극복의 상징으로 1968년 광화문 앞 세종로 한복판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졌다. 국민적 존경을 받는 영웅을 내세워 국가주의를 고취하려 한 의도였다. 이 무럽 주요 기업의 본사가 이 일대에 자리잡으며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핵심 업무 지구로 거듭난다.
권력은 시민의 것
1980년 서울의 봄, 광화문 일대에 5만여 명의 학생·시민이 운집해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곧바로 5월 17일 자정 전국 비상계엄 확대를 선포한다. 그날 권력의 공간을 잠시 점유했던 시민들은 해산했고, 이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군부가 서울 일대를 군과 경찰력으로 장악했다. 탱크와 무장군인이 배치된 광화문 거리는 순식간에 계엄의 공포에 휩싸였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을 막던 이태신이 광화문 거리의 이순신 동상과 오버랩 되는 장면은 영화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장면이었다. 실제로 이순신 동상 앞에서 권력의 폭압을 막아낸 것은 시민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군사 정권이 몰락하고 직선제가 쟁취되며 광화문광장은 민주정의 무대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 시기에는 수십만 명의 시민이 거리 응원을 펼쳐 광장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미군 장갑차에 학생들이 희생 당한 이른바 '효순이 미순이 사건'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대형 참사에 대한 추모행동,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한 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특히 2016년에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혁명이 절정에 달해, 100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우는 장관을 이루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 대통령 탄핵과 정권 교체를 이끌어내며 광화문광장을 한국 민주주의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수백년간 권력의 영토였던 공간을 시민이 점유한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 겨울 광화문은 국가 권력이 국민의 것임을 보여주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광장이었다.
노예가 주인인 공간
어원을 따져보자.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은 dēmos(민중)과 kratos(지배)이다. 어원에 가까운 민주주의의 의미는 "민중 통치"이다. 백성 민(民) 자의 어원은 무엇일까. '民' 자는 사람의 눈을 형구로 찌르는 모습을 본뜬 한자이다. 고대 상나라 때 노예의 저항력을 반감시키고 노동력을 유지하도록 한쪽 눈을 실명시킨 데에서 유래했다. 또는 당시 자행되던 인신공양을 할 때 눈을 멀게 하고 손을 묶었는데, 그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민', 그러니까 한 쪽 눈을 찔린 채 손이 묶인 노예들이 통치하는 이념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통념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단어인 것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길은 험난하다. 유시민 작가는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후불제'에 비유했다. 건국 직후 시민혁명 없이 외부의 영향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비용을 뒤늦게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등을 이러한 '후불'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87년 개헌으로 비로소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의원들이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고, 탱크가 광화문 거리를 활보하던 독재의 시대를 지나 유권자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광장은 압제의 전시장이 아닌 시민의 공원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정착할 수 있는 일정한 상태가 아니다. 여전히 특권 계층은 사석에서 '국민은 개돼지'라고 발언하고, 경영권 세습을 위해 국민 연금에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독재를 추억하는 정치 세력이 집권하여 계엄을 선포하고 국민을 '처단'하겠다 엄포하기도 한다. 광장은 아직 시민의 것이 아니다.
군부 정권의 통치가 작동하도록 한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며 당시 한국 사회에는 폭력이 보편화되었다. 가부장적, 전체주의적 분위기가 만연했고, '가장 효율적인 조직은 군대'라는 믿음이 자리잡았다. 학교도, 회사도 군대처럼 작동했다. 이러한 사회의 믿음이 군부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비슷한 믿음이 있다면 무엇일까.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사법 고시도 패스하고, '시험 잘 본' 엘리트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믿음 아닐까.
이러한 믿음의 결과 탄생한 엘리트들은 국민의 주권을 폄훼하거나 백성을 '졸'로 보기 일수이다. 민주당 지지층이 이재명 후보에 대한 검찰 수사와 이례적인 판결 속도전에 반발하는 이유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학벌을 비웃던 검사의 모습에서 느껴진 계층 의식이 트라우마처럼 떠오른 탓이다. 낮은 학벌과 '부티'가 안 나는 언어 습관, 가난한 출신의 '민'들이 전통적 엘리트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이재명 후보 재판에 대한 법조의 평가를 떠나, 이러한 세계관이 존재하는 것에는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민주주의의 어원이 '민중 통치'라면, 민주주의를 둘러싼 갈등은 통치 권력을 두고 벌이는 노예와 주인의 전쟁이다. 권력의 공간, 광장을 둘러싼 싸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종교과 정치, 경제 권력이 결탁해 광장을 폭력으로 장악하기도 한다.
권력을 장악한 소수가 '한 쪽 눈을 찔러' 다수 대중을 항구적 노비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 본성인지도 모른다. 이 대립에서 우리의 광장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결국 일상의 믿음과 싸워야 한다. 군부 정권 시절, 독재는 장남을 위해 딸들이 학업을 포기하던 집안에서부터 기원했다.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고, 군대에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일상이던 문화. 그 일상의 터전에서 독재는 싹을 틔웠다. 앞으로도 우리가 광화문의 주인이기를 원한다면, 일상의 믿음을 바꿔야 한다. 서울대에 가야 1등급 인간이라는 믿음, 군대와 회사에서 '까라면 까'야 한다는 믿음, 조직을 위해 개인이 희생할 수도 있으며, 다양한 삶을 인정하는 대신 정상성에 복무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렇게 민주주의를 학습한 개인은, 또다시 군대에 입대하여 국회의원을 체포하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국회로 모여들어 민주주의를 행동으로 쟁취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사수하는 일은, 스스로가 통치하는 일상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기억의 싸움
내가 광화문을 찾은 날, 광장의 한켠 세월호 추모 공간에서 아주 작은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기억공간’은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아 개관한 목조 건물이다. 이곳은 2021년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로 철거 위기에 놓였다. 이후 서울시의회는 기억공간의 부지 사용 기간 연장을 거부하고, 행정대집행 계고장을 발부하는 등 철거를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했다.
이에 유가족과 시민단체들은 기억공간의 존치를 요구하며 피켓팅, 1인 시위, 노래 시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항의했다. 여전히 기억공간은 단순한 추모 시설을 넘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시민운동의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날은 8년 전 우루과이 인근 남대서양을 지나다 침몰된 '스텔라데이지호 참사' 가족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아픔을 나누고 있었다.
사회학자는 아도르노는 역사에서 기억과 망각이 서로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체제 유지를 위해 ‘불편한 과거’를 지우고, 억압의 흔적을 망각 속에 감춘다.
반면 비판적 기억은 억압된 진실과 고통의 흔적을 재소환함으로써, 역사의 윤리적 책임을 회복한다. 그는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는 일이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현재를 구성하는 실천이라고 본다. 기억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폭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열쇠다. 그러니까 참된 역사인식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실천이며, 고통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국가는 없었다. 정부는 유가족을 블랙리스트 명단에 넣어 감시했다. 극우 성향 누리꾼들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지겹다‘고 말한다. ‘일베'로 대표되는 극우 일당은 단식 투쟁을 벌이는 유가족 옆에서 '폭식 시위'를 한다며 행패를 부렸다.
아 그래. 문득 오전 내내 공부했던 사회학의 쓸모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세월호의 약속은 단순한 '재발 방지' 이상의 이야기이다. 참사 앞에서 비아냥대지 않는,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과 권력이 다투는 권력의 공간 광화문의 한켠에서, 세월호는 조용한 기억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