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밤에 만난, 서울의 미얀마인

7. 동대문구 회기동

by 고생끝에골병난다


“서울살이 몇 핸가요 / 언제 어디서, 왜 여기 왔는지 기억하나요?”
(뮤지컬 <빨래>. ‘서울살이 몇 핸가요’ 中)


뮤지컬 <빨래>의 넘버 ‘서울살이 몇 핸가요?’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다. 살고 싶어서 서울에 도착했지만, 타향살이가 ‘삐걱이는 의자’처럼 불안하지는 않은지. ‘웃음이 새겨질 방’을 찾아 떠돈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가장 보통의 서울 사람에게 묻는다. 닳아서 잃어버린 꿈은 어느 방에 두고 왔는지. 많은 것들을 세간살이처럼 떠나보내지만, 어쩌면 우연한 인연에서 희망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은지.


서울은 생존을 위해 모여든 외지인들의 도시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서울살이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내는 역경에 가깝다. 회기동의 홍콩 음식점에서 한 대학생의 서울살이 이야기를 들었다. 근래의 가벼운 고민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공부와 연애,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기가 버겁다는 평범한 대학생의 난제를 토로했다. 소녀시대를 좋아하고 디자이너를 꿈꾸는 그는 미얀마 양곤시에서 온 투우리안(24세) 씨다.


경희대학교 전경


2021년 2월 1일, 투우리안의 고향 미얀마에서 군사 쿠테타가 발발했다.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국민민주연맹(NLD)이 압승한 2020년 11월, 총선 결과에 불복하며 군부가 내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무렵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인터뷰를 진행한 지난 7일은 윤석열 씨가 불법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나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내 정세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쿠테타를 피해 한국에 왔는데, 한국에서도 쿠테타가 일어났다’며 웃었다. “미얀마에 있는 가족들한테도 연락이 왔어요. 저는 한국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서 괜찮을 거라고 말해줬어요. 미얀마 군인들은 진짜 시키는대로 사람을 죽이거든요.”


미술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를 꿈꾸던 투우리안은 암울한 시기에 접어든 조국을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군부 아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처음 우리는 대학도 안 가고 일도 안 했어요. 그냥 그렇게 하면은 (군부가) 내려갈 줄 알고 기다렸어요.”그해 조국을 떠난 투우리안 씨는 3년째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SBS 예능프로그램 <런닝맨> 때문이었다. 7년 동안 <런닝맨>의 애청자였던 그는 한국어 듣기에 능통했다. 무턱대고 경기도 안성의 어학당에 도착한 뒤 6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고 입시를 준비했다. 한국은 싱가포르나 유럽에 비해 아르바이트가 자유로워 학비 조달이 편하기도 했다. 지금은 경희대학교 주거환경학과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공부한다.


눈 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소녀시대. ‘다시만난세계’ 中)



“한경대 뒤에 있는 어학당에 다녔어요. 어학당에는 몽고도 있고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그리고 태국, 베트남 사람도 많았어요. 거기서는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모여 쓰는 공통의 언어가 한국어잖아요. 많이 떠들면서 한국어가 늘었어요. 안성은 진짜 할 게 없잖아요. (웃음)” 어학당에서의 생활은 외롭고 심심했다. 한국어가 어눌한 탓에 주눅이 들기도 했다. 투우리안은 그곳에서 여자 친구를 만났다. 같은 미얀마 사람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여자 친구는 K팝을 좋아해서 한국을 찾았다. YG엔터테이먼트의 그룹 ‘WINNER’의 팬이라서 콘서트도 정기적으로 따라다닌다. 투우리안은 ‘요즘 아이돌 노래는 노래 같지 않다며’ 여자 친구의 노래 취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는 소녀시대의 팬이다. 옛날 발라드와 2000년대 한국 힙합을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더 나은 민주주의와 일상을 갈망하며 2016년 이화여대와 2024년 여의도에 모인 청춘들이 부른 바로 그 노래다.


투우리안 커플의 데이트 명소는 인천 부평이다. “부평에 미얀마 사람 엄청 많아요.” “진짜예요? 저 부평 바로 옆에 살았는데.” “부평역 근처에 미얀마 가게가 몇 개 있는데, 음식점이요. 거기 근처 가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양곤 느낌. 왜냐하면 더럽거든요.” 부평역 일대에는 미얀마 출신 노동자들이 모여들며 조성된 일종의 ‘미얀마 타운’이 있다. 미얀마 불교 사원도 자리 잡아서 부평은 대한민국에서 미얀마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장소가 되었다. 여자친구가 고향 음식을 그리워해 부평역을 찾았지만, 식당 한켠을 점령한 시끄러운 건설 현장 아저씨들 탓에 스트레스만 받았다고 한다. “근데 미얀마 노동자들이 많았구나 부평에. 근처 살면서도 몰랐어요.” “솔직히 양곤에서도 그렇게 시끄럽게 하지 않거든요. 근데 한국에서 모이니까 왜 소리 지르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에 오는 미얀마 노동자들은 왜 오는 거예요?” “어려워서, 전쟁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 때문에.”


사진: 한국일보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매일 즐거웠다. 한국 문화가 좋았고, 타향에 모인 미얀마 친구들과의 유대감도 끈끈했다. 하지만 요 근래 투우리안은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일에 피로를 느낀다. 주말이면 떡볶이집에서 하루 12시간 알바를 한다. 월세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탓이다. 평일에는 다시 학교에 나간다. 3년이 지났지만 한국인들과는 가까워지기가 어렵다. “왠지 모르겠는데 외국인들끼리 많이 다니는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저희는 한국 사람들이 살짝 무서워요. 말 걸어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만 얘기해요. 그 이후에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희가 말하면 좋아할까요?”


투우리안의 여자친구는 무례한 한국인을 만나 곤경에 처한 적도 있다. “사실 친절한 사람이 대부분이고, 무례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겠죠. 그런데 여자 친구는 가게에 오는 손님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힘들어할 때가 많아요. 그리고 여자 친구가 예전에 술집에서 일했는데 술 취하면 사람들이 사람 같지가 않잖아요. 성희롱이나 인종차별도 당하고(..)” 투우리안은 그래도 여자친구가 있어서 외로울 틈이 없었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에서도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가족들과 영상 통화를 하는 시간에 맞추어 매일 자취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혹시라도 방이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 걱정을 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동지는 간 데 없고 (‘임을 위한 행진곡’ 中)



머나먼 타향살이의 낙은 미얀마에 두고 온 가족들과의 영상 통화 시간이지만 근래에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지금 미얀마는 군부의 통제와 경제난이 극심해 인터넷 연결조차 어렵다고 한다. 이제는 전기도 끊겨서 정해진 시간에만 연결된다. 암울한 정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투우리안은 영국과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자마자 오랜 독재에 시달린 조국의 역사를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약한 탓에 반군에 가담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토로한다. “시골에 가면 군대와 싸우는 시민군이 있어요. 국민 편에 있는 다른 군대가 있어요. 처음에 도시에서 싸우다가 다치는 사람 많으니까 시골로 갔어요. 산에 숨어서 훈련을 해요.” 투우리안의 친구도 몇몇이 민주화를 위해 시민군에 가담했다. 종종 그들과 연락이 닿기도 한다. 하지만 반군은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친구들도 생활을 해야 하니까 대립이 길어질수록 시민군이 불리해요. 제 친구도 몇 명은 잡혀갔고. 이제 반군에 남아있는 지인은 거의 없어요”


미얀마 정부는 모든 젊은 남성들을 징집해 6년씩 군에 동원한다. 군벌을 위해 복무하기를 거부하는 투우리안은 졸업을 해도 미얀마에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정세가 안정되는 대로 고향에 돌아갈 계획이다. 가족의 만류가 있지만 당장이라도 귀국해 무엇이든 돕고 싶은 생각이다. 조국의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돕고 싶다는 그의 눈빛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빈곤과 피지배, 압제와 고립. 같은 역사를 앓아온 사람들이 공유하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다민족 국가인 미얀마의 특성상 반군과 정부군, 각 민족 반군 간의 대립이 극렬하다. 그 탓에 단합된 민중의 저항이 어렵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우리안은 한국의 현대사를 물어왔다. 나는 그에게 위로를 담아 대답했다. 우리나라도 40년 가까이 독재에 신음했다고. 광주에서 군대가 시민을 학살했지만, 시간은 진실의 편이었다고.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고. 지금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절박하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서울살이 여러해, 당신의 꿈 아직 그대로인가요.
(뮤지컬 <빨래>. ‘서울살이 몇 핸가요’ 中)


인터뷰를 마칠 때쯤 옆 테이블에 새로운 손님들이 앉았다. 인도계로 보이는 그들은 어설픈 한국어로 인사를 나눈 뒤 힌디어로 수다를 떨었다. 우리 테이블의 계산을 도와준 사장님은 홍콩인이었다. 그는 유창하게 물어왔다. “두 분은 따로 계산하세요?” 투우리안이 대답했다, “제가 계산할게요. 미얀마에서는 형이 동생한테 밥을 얻어 먹으면 안 되니까.”



서울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강남의 높은 지대는 누가 지탱하는가. 매일 아침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싣고 강남역을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외지인이 모여 일군 도시가 서울이라면, 이제 서울은 한국인만의 도시가 아니다. 서울의 오늘은 수많은 인종의 ‘서울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정혜승 작가는 한 유튜브 방송에서 ‘이미 대한민국은 다인종 국가인데, 비싼 아파트 단지 주민들만 그걸 모른다. 지하철 2호선이 결계 역할을 한다’는 농담을 했다. 공동체의 기능을 떠받치는 ‘가장 보통의 서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상상해 본다. 청량리시장 지하에 도라지를 세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대림동과 자양동의 중국인이 마라탕과 탕후루 문화를 유행시켰다. 재건축 아파트를 짓는 동남아 아저씨가 있고, 회기동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홍콩 상인이 있다. 군사 쿠테타와 독재라는 조국의 역사적 상황을 피해 꿈을 찾아 떠나온 투우리안씨가 있다.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설가 한강(54)은 맨손으로 계엄군을 막아선 시민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투우리안의 서울살이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과거의 우리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질까. 군부에 잡혀간 친구들은 생사를 알 수 없고, 가족이 있는 고향에는 돌아갈 수 없다, 그 사이 투우라인의 서울살이는 여러 해가 지났다. 다시 뮤지컬 <빨래>의 노랫말이다, “서울살이 여러해, 당신의 꿈 아직 그대로인가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에요.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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