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니 공기의 차가움이 다르다. 대학 시절 이맘때가 되면 친구들은 바빴다. 신춘 문예 응모를 위해 제각기 모아 놓은 자신의 글을 다듬고 완성된 글을 우체국을 통해 각각의 신문사에 보내는 시기였으니까. 나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완성된 자신의 이야기를 들고 우체국으로 향하는 친구들의 설레는 총총거림을 질투했다. 나의 스무 살은 온통 잿빛이었다. 원하는 과에 들어오긴 했지만, 집안 사정으로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하기 어려웠다. 빛나는 친구들의 청춘을 보며 나는 같은 청춘도 다르구나 싶었다. 작가가 되고 싶어 대학에 왔지만 나만의 문장으로 된 정성스레 담아낸 글들을 써 나가는 대신 그 시절, 청소를 했고, 그릇을 닦고, 손님들을 상대하며 값진 청춘의 시간을 헐값으로 바꾸었다.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나는 한 번도 신춘 문예에 응모할 수 없었다. 나에게 글이란 사치가 아닐지 생각하던 시절이었고, 그게 맞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스무 살의 여름, 담당 교수는 우리에게 과제를 내 주었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완벽히 필사해 올 것. 그 여름, 나는 1학년 한 학기를 바치고 곧바로 휴학해야 했고, 필사도 하지 못했다. 살면서 스무 살의 여름 방학 숙제를 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 나에게 여유가 생긴다면, 그때 못한 그 숙제를 꼭 해야지. 언젠가는. 하지만 그런 시간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본다. 스무 살의 내가 썼을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슬펐을까? 온통 잿빛이었을까? 그래도 어떤 순간은 너무 아름다워서 붙잡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까? 그 이야기들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서 뒹굴고 있어서 여전히 나는 서럽고 아픈 게 아닐까? 나는 다시 스무 살 여름으로 돌아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부터 필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에게 묵힌 이야기들은 이제 꺼내 줄 때가 된 건 아닐까?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멀어지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들을 이제라도 잘 꺼내서 멀리 보내 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이제 나를 그만 놓아주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대학 교정을 거닐던 스무 살의 나를 이제 놓아주고 싶어. 그 시절의 아픔과 상처를 이야기로 훨훨 날려 보내고 싶어. 촌스러운 이야기라도 꾹꾹 눌러쓴 다음 가벼운 마음으로 휘~ 보내 줄게. 뭐든 써서 이제는 멀리 보내 줄게.’
다시 스무 살이 되어 써 보자. 글 속이겠지만 다시 스무 살이 돼 보려니 어쩐지 쑥스럽고 설렌다. 며칠 전 남편이 내 키보드의 업 up(↑) 키를 꽃 모양 키로 바꾸어 주었다. 나를 응원하는 메시지도 함께 써 주었다. 인생의 리즈 시절이 꼭 청춘에 있으라는 법이 있을까? 나의 리즈 시절은 스무 살을 다시 써 내려가는 지금이 아닐까? 글을 쓰며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가 그 시절을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가고 싶다. 그 시절, 고단했던 나에게 할 수 있는 격려를 해 주고, 미숙한 나의 문장들을 다독이며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다시 자라고 싶다. 멈춰있던 나의 성장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픔은 뒤늦게 온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다시 시작된 나의 스무 살은 어쩐지 어색하고 새롭고, 때로는 아름다워서 나를 설레게 한다. 글을 써 내려가며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내 이야기가 세상에 닿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나는 계속 쓰는 일을 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