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아래로 돌린 날 시작된 기적
일요일 아침이다.
오늘로 파수된 지 엿새째.
나는 병상 위에서 조용히 예배 영상 속 찬양을 듣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은혜’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찬양을 듣다가, 숨이 턱 막히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처음 파수 된 날, 초음파 화면 속 새싹이는 역아였다. 작은 머리를 위로 향한 채, 웅크리고 있었고 양수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폐 발달에 필요한 최소한 공간조차 부족하다는 절망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런데 수요일, 아주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초음파를 보던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아기가 머리를 아래로 돌렸어요. 양수가 2cm를 유지하고 있네요.”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태아가 머리를 아래로 돌리면 중력 덕분에 양수가 아래로 고일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 새싹이가 그렇게 해낼 줄은 몰랐다.
그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살아보겠다’는 분명하고도 용감한 의지였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도와준 것도 아닌데 새싹이는 작은 몸을 버둥거려 생존하기 유리한 방향으로 틀었고 양수가 모일 공간을 확보했다. 그 후, 양수의 손실이 줄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병상에 누운 채로 듣는 찬양은 그 장면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새싹이의 용감한 움직임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고. 우리 가족들, 그리고 많은 분들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며 이 작은 생명을 위해 기도해주었고, 그 기도의 자리를 하나님이 지켜보셨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혹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엄마와 아기의 연결된 생존 본능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사랑의 힘, 생명의 기적, 설명할 수 없는 신비.
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분명한 건 새싹이가 의학적 계산을 뛰어넘어 스스로 ‘살고자’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주치의 선생님의 태도도 달라졌다. 말투는 여전히 침착하고 차분했지만, 눈빛 어딘가에 함께 해보자는 결심이 배어 있었다.
“아기가 정말 잘하고 있어요. 해낼지도 모르겠네요.”
그 한마디에 남편과 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 짧지만 깊은 위로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병실 침대에 누워 예배 영상 속 찬양에 다시 귀를 기울인다. 눈물이 흐른다. 슬퍼서가 아니다.
그저… 새싹이가 너무 기특해서.
이 작은 아이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의지로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해서.
오늘도, 새싹이는 조용히 싸우고 있다. 나도 그 싸움을 응원하며 조용히 숨을 고른다.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오늘 하루도 함께 잘 버텨보자고 속삭인다.
고맙다, 새싹아.
살아줘서.
싸워줘서.
살고자 의지를 보여줘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되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