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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잎새가 남긴 새싹이

이별과 기다림의 바람 사이에 피어난 새싹

by 새싹맘

남편은 아프리카 식물인 유포르비아 암보봄벤시스 화분을 정성껏 돌본다.

우리 부부에겐 그 식물이 참 각별하다.

처음엔 잎이 두 개였다. 마치 나와 남편, 우리 둘을 닮은 작은 녹색 가족처럼.


신기한 일이었다.

임신할 때마다, 꼭 그 화분에 새 잎이 돋았다.

처음엔 우연이라고 여겼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잎이 피어날 때마다 "혹시 아기가 오려나?" 하는 마음에 조용히 기대하게 됐다.


잎이 셋이 된 어느 날 즈음, 아기가 찾아왔다.

우리는 그 아이의 태명을 ‘잎새’라고 지었다.

살랑이는 바람에도 흔들릴 것 같은, 여리고 예쁜 이름.

나는 매일 배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잎새야, 잎새야, 우리 예쁜 아가야."


하지만 잎새는 너무 짧게 우리 곁에 머물다 갔다.

그날 아침, 피가 보여 병원에 갔다. 의사는 단순히 자궁 경부가 헐었을 뿐이라며 안심시켰고,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몇 시간 뒤, 아무런 인사도 없이 잎새는 바람에 스치듯 내 안에서 조용히 떠났다.


그날 이후, 나는 자꾸만 세 번째 잎을 바라보게 됐다.

잎이 셋인데,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기분.

불완전한 시간 속에서, 내 마음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다시 용기를 냈다.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며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던 어느 날,

남편은 설레는 얼굴로 뛰어와 말했다.

“잎이 또 하나 났어. 넷이 됐어!”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피어난 네 번째 잎.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정말 잎새 동생이 와주려나?’


그래서 태명은 ‘새싹’이라 부르기로 했다.

잎새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세상에 뿌리를 내려볼 준비가 된 아이처럼 느껴졌다.

유산이라는 깊은 아픔을 겪은 뒤였기에, 이번에는 꼭 지키고 싶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잎새가 속삭인 것 같았다.

“엄마, 내 동생은 지켜줘. 이번엔 꼭 품에 안아줘.”


양수가 터진 뒤, 위태로운 시간이 이어졌지만 그 와중에 새싹이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 친정 식구들은 힘이 넘치는 아이가 되길 바라며 ‘돌쇠’라고 불렀고,

시어머니는 쑥쑥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쑥쑥이’, 그리고 마음이 단단하길 바라는 기도로 ‘씩씩이’라고도 불러주셨다.


조기 양막 파수라는 벼랑 끝 상황에서도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고, 모두가 진심을 다해 새싹이를 불러주었다. 그 이름들에는 염려보다 믿음이, 두려움보다 응원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았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를 때마다 느껴지는 건 하나였다.

‘우리가 함께 새싹이를 응원하고 있구나.’


새싹이는 처음부터 우리 둘만의 아이가 아니었다.

잎새가 남기고 간 빈자리를 간직한 채, 다시 찾아온 봄처럼 모두의 기도와 사랑 속에서 천천히, 조용히 피어난 새싹이었다.


양수가 터진 날, 아직 새싹이가 살아 있다는 걸 몰랐을 때, 어머님은 새싹이가 떠난 줄 알고, 긴 문자를 보내주셨다.


애많이 썼다. 은새아...

깜박 잠든 사이에 꿈에 우리 새싹이 울면서 보내줬다.

5개월 네 품에 있다가 간 새싹이는,

다음에 아주 건강한 나무로 너희들에게 다시 올 거야. 반드시..

일단 지금은 무조건 네가 제일 소중하니까 너무 울지 말고...

울면 눈이 안 좋아져~ 그리고 몸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그래야 새싹이가 큰 나무로 왔을 때 번쩍 들어 안아주지~

네가 더욱 씩씩해야 해.

동건이랑 서로 위로하고 사랑해라.

너희 둘이 최고야!

네가 안 다쳐서 천만 다행이야.

우리는 항상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해.

너무 깊이 슬퍼하지 말고.

그래도 너랑 동건이가 있잖아!


그 문자를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 나는 어렴풋이 알았다.

이 아기는 단지 새싹으로 머무르지 않을 거라는 걸.

지금은 작고 여리지만, 언젠가 깊은 뿌리로 버텨내고 넓은 가지로 사랑을 품는 나무로 자라날 거라는 걸.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오늘, 어머님은 또 하나의 문자를 보내주셨다.


은새야. 이래저래 1주가 지나갔구나.

대견하게 잘 견디고 있는 네가 너무 안쓰러우면서도 장하다...

살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을 겪게 되면서, 우리는 단단해지고 감사할 일들을 쌓게 되는 거 같아.

지금은 그저 너랑 씩씩이 둘 모두 건강하고 무사하기만 바라는 기도의 제목이다.

반드시 그럴 거야.

하루하루 잘 버티면서 무사해보자.

어떻게 해줄 수도 없고, 너무 안쓰럽다.

힘내보자 은새야 ♡


나는 그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사랑과 진심이 새싹이에게 닿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새싹이는 지금, ‘나무가 되려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푸른 잎을 펼치고, 튼튼한 몸을 세우기 위한, 아주 오래된 잎새의 약속처럼.


지금 화분의 잎은 여전히 넷이다.

그 잎들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

그 바람엔 떠난 잎새의 숨결도, 새로 온 새싹의 의지도 깃들어 있다.


나는 믿는다.

이번에는 꼭, 새싹이와 함께 푸르고 튼튼한 계절을 맞이하게 되리라고.


잎이 넷, 새싹이 하나.

그 작은 식물 하나에 담긴 우리의 계절은 슬픔과 기다림, 기도와 사랑으로 지금도 조용히, 푸르게 자라고 있다.


떠난 잎새가 남긴 새싹이.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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