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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 감사했어

병실의 겨울, 내 안의 봄

by 새싹맘

발리로 떠나기로 했던 바로 그 주말이다. 창밖엔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고 있다. 직접 마주할 순 없지만, 창문 너머로 퍼지는 고요한 기운만으로도 겨울이 성큼 다가온 걸 느낄 수 있다. 찬 바람 대신 차가운 병실 공기를 마시며, 뜨끈한 찜질방이 그리워졌다. 노곤노곤 몸이 풀리던 뜨끈한 구들방과 시원한 식혜.. 동생이 보내준 찜질방 사진을 바라보며 나만의 상상 찜질을 시작한다. 병상에 누운 지 6일째, 나는 이제 내 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조심스레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 아침엔 피검사 결과가 나왔다.
다행히 염증 수치는 정상이었지만, 멈추지 않는 하혈 탓에 결국 빈혈이 왔고 철분 주사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도 새싹이는 씩씩하다. 심장 소리는 또랑또랑 울리고, 꼬물꼬물 태동도 아주 활발하다. 의사 선생님은 하혈이 조금 줄었다고 말해 주셨지만, 마음속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오늘 오후엔 초음파 검사를 했다.
양막이 다시 붙었을까? 양수는 얼마나 남았을까? 숨죽이며 기다린 순간, “양수는 유지 중이에요.” 그 한마디에 조금 마음이 놓인다. 지금 내 양수 수치는 2cm. 정상은 8~15cm. 주치의 선생님은 계획을 변경하셨다. 24주까지 버틴 후 대학병원으로 전원 하는 게 원래의 목표였지만, 지금 상태라면 23주가 현실적인 마지노선이라고 했다. 지금은 20주차. 앞으로 3주만 더 버티면 새싹이를 받아 줄 병원이 생긴다. 작지만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나는 점점 ‘원시인’처럼 변해가고 있다.
남편이 물 없이 쓰는 샴푸로 머리를 조심조심 감겨주지만, 뿌리부터 엉켜버린 머리는 도저히 처치 불가능이다. 결국 친정 엄마에게 머리를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 장기전이 될 거라는 걸 인정하고, 패배의 백기를 든 것이다. 내 몸에서 불필요한 건 하나씩 내려놓자.

시간이 흐르고, 간호사 선생님이 오셨다.

새싹이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고, 피 묻은 산모 패드를 갈아주신다. “왜 이렇게 피가 멈추지 않을까?” 괜찮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지만, 문득 문득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나는... 정말 괜찮을까?”


하혈로 체온이 떨어지며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급하게 삶은 계란 하나를 까먹었다. 몇일 익숙한 맛이 입에 퍼지며 조금씩 기운이 돌아온다. 그 모습을 보고 엄마는 내가 매 끼니마다 뭘 먹는지 하나하나 체크하신다.

“엄마, 계란 좀 더 삶아와 주세요.”

“그래. 엄마가 먹고 싶은 거 다 해 올게.”

감사하고… 또 미안하다. 새싹이가 태어나면 꼭 말해줘야지. “너 할미 삶은 계란 덕에 살았어.”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아주 강한 태동을 느꼈다. 퍽! 누가 내 배를 걷어찬 줄 알았다.

놀라고 감격스러웠다. “새싹이 수영 선수 시켜야겠네. 나와서 엄마한테 죽도록 효도할 아이야.” 남편이 농담처럼 말했지만, 양수가 거의 없는 환경에서 이렇게 태동이 활발한 걸 보면 새싹인 아주 작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게 분명하다.


남편은 오늘도 한결같이 내 곁에 있다. 밥을 떠먹여주고, 칫솔과 치약, 치실, 충전기, 영양제, 수건을 갖다 주고 머리를 빗어주며 내 손발이 되어준다. 산모 패드도 갈아주고, 항생제와 자궁수축억제제가 다 들어가는지도 확인하고, 다 들어간 주사 바늘을 정성스럽게 뽑아서 간호사 선생님께 넘긴다. “아빠가 아주 섬세하시네요.” 간호사 선생님도 감탄하셨다.


오늘은 처음으로 소변줄도 갈았다.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도, 이 소변줄은 여전히 불편하고 답답하다. 잠깐이었지만, 이 갑갑한 줄을 뺐을 때 시원함이란… 누워있는 하루하루가 답답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작은 해방감을 느꼈다.


저녁이 되자, 남편이 내게 물었다. “오늘은 뭐 챙겨갈까?”

“바디워시, 수건 여러 장, 티슈, 손톱깎기, 마스크팩, 머리빗, 로션, 면봉… 그리고 오늘 신문도! 코가 막혀서 잠이 안 와.” 하소연했더니, 남편은 습도를 체크하더니 곧장 가습기를 샀다. 질끈 묶을 머리끈도 필요하다며 챙겨줬다. 조용하고도 세심한 사랑에 마음이 젖는다.


남편이 잠깐 나간 사이,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으니, 더더욱 가고 싶은 곳이 많아진다. 신혼여행 갔던 프라하도 떠오르고, 그 때 먹었던 굴뚝 빵이 생각나 제과점을 검색해봤다. 아직 오지 않은 봄날이 벌써 기다려진다.


남편이 돌아오자, 여전히 조심스레 묻는다. “피는… 아직 많이 나와?”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남편의 마음은 이미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고여 있던 게 아니라, 새로운 피 아냐?” 나도 살짝 떨렸지만, 다시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기로 했다. 남편은 곧장 나와 새싹이에게 힘이 될 빈혈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다.

오늘도 우리는 버텼다. 함께 살아냈다. 아직 몸은 아프고 마음은 무겁지만, 그래도 기쁘고 따듯하다. 쉽지 않았던 하루였지만, 조심스레 고백해본다. ‘그래도 오늘, 감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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