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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19. 2023

빨강을 그으며 주저앉는 바다

힘찬 항해 새로운 여정

   - <생 마리 바다 풍경> 빈센트 반 고흐.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과수원 나무마다 향기가 난다 

이마를 맞댄 꽃들은 연두를 품고 피어난다 

마른 가지가 후르르 한들한들 초록이 오른다 

잎새들이 날아오르며 웅얼웅얼 휘파람을 분다 

풍경 속 사물들이 서로를 밀어올리며 배경이 되어준다 

흙과 밭이 꿈틀대며 일어나 쟁기질을 한다 

사람과 그림이 서로 들락날락 가만히 분주하다

곳곳에 열리는 숨길, 바람, 고흐 천지!    


하아~ 오른쪽으로 한 발 떼며 고개를 드는 순간 

청록색 덩어리가 끼얹힌다, 뒤집어쓴다 

시퍼런 무엇, 그건 고등어떼인가

뒤집힌 것들은 얼굴에 얼얼한 멍을 남기고 후퇴

두어 줄 빨강을 그으며 일시에 주저 앉는다, 바다다

파도다 아니, 물결 

물결들이다, 하는 순간 

용솟음치는 파도가 휘감겨 오르더니 

하강시키며 또 한 번 뒤흔든다 

절제된 힘을 맞받는 소리 없는 동력 

바다의 둔한 춤,을 밟고 

나는 가까스로 파도를 탔다

그러나 붉은색은 없다     


빨갛게 남은 인상, 이건 뭔가 

그림 왼쪽 아래 그의 싸인이 밑줄과 함께 붉으며 굵고 크다

Vincent 너무나 놀랐습니다! 

특별한 바다도 파도나 광경도 아니잖아요

생마리 바다 풍경*     


힘차고도 조용히 단번에 나를 뒤집었다 

이미지의 욕망이니 그림이 나를 원한다느니 

라깡의 말들은 단지 비유가 아니었던가 

정동의 전이로 송두리째 휩싸이는 환상적 순간이 

정신분석가 앞이 아니라 그림 앞에서 발생하다니!

 

껌뻑 녹아내릴 듯 놀랐으나 참으로 아름다운 바다

순식간에 상쾌함으로 정렬되는 풍경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나는 파도를 마셨다

흔들리는 평화 위에 누워 조금도 무섭지 않다

시퍼런 초록 바다 생명을 먹고 변화로 간다 

힘찬 항해 새로운 여정 잔잔한 떨림     



                                                                                                                                         

* “내 그림에 싸인하기 시작했지만 바보 같아 보여서 곧 그만두었어. 그러나 바다 그림 하나에는 대담한 빨간색으로 서명을 했어. 녹색에 빨간색을 입히고 싶었기 때문이야.” 1888년 8월 14일경의 편지다.

여행에서 돌아와 고흐의 편지를 읽다가 이 문장을 발견하고는 심장이 서늘해졌다. 그는 이렇게 의도하고 준비하고 생각하면서 줄 하나 선 하나 색 하나를 부여했던가. 이른바 질병의 이름으로서 광기나 정신병을 그는 완전히 인식하고 함께 먹고 마셨던가.      



<생 마리 바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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