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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냄이 끝내 아름답고

우리가 서명할 자리를 남긴

by 박경이

- <부추 화분> 빈센트 반 고흐.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 <누운 게> 빈센트 반 고흐.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부추 향내 터지는 화분은 이미 녹색 꽃다발

하얀 동그라미 꽃방울 숨긴 초록들이 다정하다

가녀린 줄기 잎새 파릇파릇 곧추 섰다

아픔이 단단할지라도 맑고 곱다


등 대고 누운 게는 누운 참이 쉴 참

게가 꽃 같다 뒤집혀도 꽃송이

힘찬 숨길 따라 빛이 길을 연다

아픔은 지고 아름다움만 남는다


아름답다

고흐의 그림은 아름답다

어둠인 줄 알면서 어둠 속에 머무르며

상처가 숨과 빛의 통로임을 알게 한다

존재가 자신을 풀어내며

드러남을 선언할 때면

그 창조는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핵을 돌며 끝없이 분화하는 그의 곡선들

부드럽고 힘찬 꼬물거림으로

불러내는 생명마다 생의 울혈을

그 모질게 타오르는 힘을

잔혹하도록 아름답게 그려내는 빈센트

두려움과 섬뜩함도 아름다움을 통해 말한다

내면 깊숙이 물결을 일으키는 색과 선들

드러냄이 끝내 아름답고야 만다

아름다움으로 매혹당하는 우리

한 발 더 내딛는 우리


자신을 무수히 찢고 견디며

늪을 지나 숲을 뚫고 태양을 만들며

지문指紋 같은 인간의 곡선을 세상에 나눈 사람

나는 그의 지문에 내 지문을 맞댄다

그림으로 재물을 얻지는 못했으나

생을 관통한 친구·형제를 가진 사람

미래에 올 모든 이들을 환대하며

자신의 그림에 우리가 서명할 자리를 남긴 사람

그 자리에서 마음껏

좀 더 살아보고 싶은 우리

<부추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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