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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22. 2023

위로가 아니라 갈등이다

사람들이 고흐를 좋아하는 이유

  - 카드에 그린 <자화상>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1

살짝 보고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중에 꿀꺽 

들이마신 그의 색과 형상은 오래오래 나를 키웠다 

아프지 않을 만큼 겨우 보면서도 

보기를 멈추자마자 다시 눈을 반짝여야 했으니 

그에게서 비롯된 모든 불꽃들은 끊임없이

타자의 자리에서 거듭 나를 볶았던 거다      


배반, 고흐는 위로가 아니라 갈등이다 

내면에 균열을 만들고 갈등을 일으킨다 

억압된 표상을 건드리는 침묵의 회오리는  

봉합해 놓은 상처를 헤집고 뜯는다 

원하는 게 뭐냐고 그림이 묻는다 

진정 원하는 게 있기나 하냐고 몰아세운다 

죽은 욕망을 충동으로 살린다     


2

빈센트, 다시 말해야겠습니다 

당신의 초상화들은 마주하기 힘들었어요 

고정되기를 거부하는 그 시선을 어떻게 맞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믿고 흔들림에 내맡겨보라고 권하니까요 

한바탕 미쳐보기가 그렇게 두렵냐고 안타까워 하니까요 

어찌 할 바를 몰라 얼른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당하게 열중하는 당신이란 존재를 

부서진 기계 같은 내가 어찌 알 수 있을까요 

팽팽한 힘줄로 진실된 언어에 전념하는

당신의 눈빛을 어찌 맞받을 수 있을까요

맘껏 옮기며 흔들림이 가능한 인간의 뿌리를

그 탄탄한 있음과 깊음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내 앞에 놓인 종이들의 허연 공백이 오직 두려웠을 뿐     


방금 나는 당신의 자화상 하나를 오래 잘 보았습니다 

거친 재, 혹은 잘게 부순 짚을 끼얹은 듯한 

‘i자와 쉼표’, ‘불티처럼 튀어오르는 색깔’ 가운데* 

당신은 흩어져버릴 것 같았는데, 바로 그

그 불티들이 눈보라처럼 몰려 당신을 만들어내더군요!

옅은 옥색, 눈의 연못은 한없이 깊었습니다   

   

다른 초상화보다 훨씬 부드럽고 맑은 

얼굴로 드러난 것은 카드에 그렸기 때문입니까 

충분히 사용할 물감이 없어서인가요 

이제 무엇도, 어떤 것도 당신과 관련하여 

슬프거나 속상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고마워요, 빈센트      


3

뽑힐 것이 뽑히고 새것이 나도록 조용히 

계속 아름답게 천천히 흔들어주는 그의 그림들

인간의 고통에 답하며 위로하는 동시에 

강약을 조절하며 흔들기를 반복함으로써 

억압을 두드려 깨우고 일으켜 

승화를 향한 길을 찾아 나서게 하는 

보편적 이미지나 색채이자 형상이 있다면 

고흐의 창조물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호를 좋아하는 이유다 


나도 모르게 진정 나이고 싶어서 

휘청대며 가는 길에 그가 함께였으니

이제 고흐를 좋아했었다,로 바뀌리라

예술 없이도 호흡이 충분할 때 

예술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니 

근원적 정동에 반응하는 음악이 아쉽지 않으며 

어긋난 결을 건드리는 노래가 그립지 않으니

민트향으로 사라지는 어떤 그림에도 친절할 수 있으니     


내면에 유령들의 출몰이 뜸하다면 

외부의 소리도 불필요할 터 

나의 음악이 내 안에 흐를 터이다 

남의 노래가 그립지 않은 날들은 곧 

색에 홀리지 않으며 내 빛깔을 부르고 

내 말로 나를 그리고 노래할 터이다      


주체로서 내가 만드는 나의 시간 

내 고통의 자리에서 남의 고통을 읽으며

죽어서 함께 사는 자들과 대화하며 

자잘한 것들을 새로이 경험하는 즐거움

어떤 수식어에도 미소지을 수 있는 때  

가무한의 덧셈에서 진무한의 뺄셈으로

그리하여 무엇도 필요 없는 때     


                                                                                                                                      

* ‘i자와 쉼표, 심지어 화가가 사방에서 짓누르고 거듭 뒤섞는, 신바람 나서 불티처럼 튀어오르는 색깔까지 나사로 돌린 듯한 붓끝의 한 점을 가장 우선시하는 화가...’ (앙토냉 아르토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조동식역. 숲. 85ㅉ) 



카드에 그린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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