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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Jan 25. 2023

일상, 작고 위대한 반복

환멸로 부서짐을 알기에

  - <우유를 따르는 여인> 베르메르. 레이크스미술관. 암스테르담 

    

사람들로 수 놓인 초록 잔디밭을 지나 고흐미술관과 마주보고 있는 레이크스미술관으로 걷는다. 선도적 문자 설치물 I amsterdam이 가까워진다. 문자들 사이에 기대고 올라앉은 작은 사람들, 귀엽다. 나도 겨우 렌즈 방향을 바꾸어 a 언저리에서 셀카를 찍어본다, 어설프지만 꽤 재미있다. 미술관의 그림자가 대칭으로 흔들리는 연못가에서 장난치는 젊은이들이 예쁘다.      


여인은

맞춤하게 빵을 떼어놓고 

우유를 그릇에 붓는다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 조심히 따른다 

항아리의 우유는 긋지 않으니

‘샘’의 발원지가 여기임을 알겠다 

누구나 따르던 우유를 이제 그녀 혼자만 

영원히 따르는 특권을 가졌다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고요와 집중 속에 

항아리에서 그릇으로 

하루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의 종말은 

가능하지 않다”

쉼보르스까야의 시詩 ‘베르메르’

삶을 떠받치는 작고 위대한 노동과

그것을 발견한 화가에게 헌정하는 시다  

   

일상의 태도에서 갑자기 드러나 발견되고 

사로잡히는 순간의 꼼꼼한 매혹은 

삶을 장대히 견디며 살아가는 힘이다 

보잘것없는 자신의 노동에서 비롯되는 

정밀한 뿌듯함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소소하게 손발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일

그것이 종종 환멸로 부서짐을 알면서도 

매료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

부서질 수 있음을 알기에 지키려는 

지울 수 없는 의지, 완전한 받아들임     


덕분에 누군가는 바쁜 척을 멈추고 지금을 발견한다

순간의 소중함 속에 숨 쉬는 것들을 연민으로 품을 수 있다

내가 줄 수 없었던 것은 잊고 받은 것에 감사한다

우울을 품고도 태양 아래 반짝이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작은 기쁨을 생생히 느끼며 한 번 살아보라는 

순한 사람들의 천연색 목소리가 또르르 흐른다     

 

그리하여 그녀가 고요히 자신의 일에 집중하되 

다른 사람을 위한 우유만 따르지는 않기를 

낱낱 살아보는 아름다움으로 

삶을 전하고 영감을 주되 

스스로도 그러하기를

마르지 않는 샘, 일상, 작고 위대한 반복

모든 환대와 가능성의 자리

<우유를 따르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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