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똥이니

시간의 궁륭 통과하기 ㅣ

by 박경이


둘째 언니 생일에 내가 언니와 올케들을 모셨다. 덕산에서 온천하고 아산에서 저녁 먹고 시장구경에 즐거웠다. 추우니 얼른 호텔로 가자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다. 찐빵도 튀김도, 그저 사람들과 눈인사하며 두세 마디 말 나누는 게 좋아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산다. 추위 속에도 새파랗게 일어서는 대파를 샀고 색색이 풍성하게 담긴 콩 몇 가지와 시금치도 샀다. 먹을 일이 없어 혹시 버리게 될지라도 일단은 파는 이의 손을 떠나야 하는 것들을 산다. 그게 채소들의 보람이자 길러 보내는 이의 기쁨일 것이다. 상점거리를 기웃거리며 예쁜 목도리도 사고 옷도 샀다. 그리고 술 한 잔 없이도 하룻밤을 같이 보내며 나눈 이야기들은 조금 아프고 참 다정했다.


감사와 그리움으로 좋은 추억을 나누다 보면 잊힌 기억이 따라 나와 나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누군가 일부러 덮개로 가려놓은 듯 낯익으나 섬뜩한 기억이 열린다면 더욱 반가운 일이다. 나를 알 수 있는 열쇠일 가능성이 있는, 정신분석가 앞에서도 쉽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주로 깔고 앉아 모른 척하는 고통들, 대타자의 해명이 요구되는 기억들일 테다. 주체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재해석을 요구하며 삶의 관계들을 위협하는 동시에 더없는 생의 동력으로 강력하게 작용했던, 진짜 내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작별이 필요한 것들.

그다지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지라도 고통스러웠던 감정이나 사건들이 시간의 힘을 입고 잘 발효되어 마침내 다른 해석과 새로운 의미의 옷으로 갈아입을 때 나는 살아있음의 생생함을 체험한다. 잘 살고 있다는 강한 느낌으로 더욱 살고 싶어진다. 각자의 당시 형편과 위치를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일은 이전의 나와 우리를 다시 살면서 지금을 함께 살아가는 엄청난 실천일 테다. 그건 끊임없이 사물의 겹침과 이면에 대해 생각하게 함으로써 나와 다른 삶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도록 돕는다. 좋고 나쁨이나 옮고 그름을 떠나 사물과 현상의 불가항력적인 부분을 받아들이게 한다. 나는 짧은 동굴 같은 기억의 회오리 속에 그 시간의 궁륭 통과하기를 좋아한다. 여러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굴에서 나도 몰랐던 수많은 나와 타자 들을 만날 때마다 다음으로 건너갈 튼튼한 다리가 어느새 놓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좁아도 분명한가 하면 기쁨과 감사에 닿는 길임을 알아가는 중이다.


그리하여, 잘못은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해서 안된다는 말의 의미를 아하!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면 어떨까. 어떤 삶도 인간도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말에도 깊은 공감의 물줄기 하나 퍼올릴 수 있다면? 그래서 이런 만남의 자리를 점점 즐기는 것 같다. 내 언니들은 더욱이나 밥의 고통과 맛과 즐거움을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맛있고 보람이 넘치는 밥의 시간, 인간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용서하게 만드는 시간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미 한창 젊어본 사람들은 알리라, 꼭꼭 씹어 먹는 나이가 얼마나 찰지며 고소한지.


잘 자고 난 다음날, 늦은 아침으로 뭘 먹을까 하다가 신례원 기사식당이 번쩍 떠올랐다. 마침 천안으로 오는 길이니 잘 되었다. 작은 양은냄비에 담아주는 1인분을 항상 아주 조금 더 먹고 싶게 만드는 곳. 집이 오래되고 낡을수록 음식 맛은 깊어져서 근처를 지날 때면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식당이다.


침 삼키며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똥냄새가 요란하다.

어머나, 아직 먹지도 않은 밥이 어느새 똥이 된 거야?

그렇구나, 밥이 똥이네, 하하 호호호.

우리 오늘 재수 좋겠네, 통하는 날이야 하하하.

식당 마당의 분뇨수거차는 아랑곳없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고 있던 세 남자들, 서두르는 품새가 설핏 느껴진다.

미안한 마음이 일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방을 찾아 앉는다.

누구도 미안할 필요가 없지만 미안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문짝도 없는 방, 뜨뜻한 바닥에 앉으니 마음이 순해진다.

시장기에 얹혀 그 순함이 더해지는 순간, 말이 끊겼다.

내 손으로 밥을 만들고 먹는 일이

똥을 만들어내고 치우며 사는 일이

얼마나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일인지를 잘 알며

앞으로 더욱 잘 알겠다는 맹세이자 기도 같은 침묵이었다.

언니들 모두 아직 내려놓지 못한 자기 밥의 무게를 아는 것만 같았다.

그러므로

여기 이 자리 우리 모두는

맛난 밥 먹어 마땅한 일꾼들이니 정말 천천히 편하게 드시기를!


골고루 먹고 싶은 욕심에 우리는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동태찌개랑, 돼지주물럭 주세요, 김치찌개도 주세요.

오징어불고기는 2인분 주세요.

엄마야, 이 집 왜 이렇게 맛있니. 하나하나 모두 간이 맞네.

음식에 유독 까탈스런 큰언니가 고루 먹으며 칭찬일색이다.

남김없이 싹싹 먹고 더 달래서 다 먹었다.


저녁엔 애들과 남편들까지 불러 천안에서 한바탕 또 먹었다.

묵은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우리는 신나게 웃으며 거침없이 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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