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은 먹이가 되고

빨간 머리 앤

by 박경이


1

문득 우리집 2층 지붕을 쳐다보게 될 때면 초록색으로 하지 못한 게 속상하다. 그런 말씀 못들었는데요. 저도 여쭤볼 생각을 못했네요. 초록으로 하라고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내가 말을 안했나. 그런 것 같다,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준비해 온 재질로는 초록색이 없는데 어떡하죠. 다리가 후들, 등짝 한 대 얻어맞은 듯 했지만 그것으로 끝. 나는 바꾸라고 말하지 않았다. 가져다 되물리고 초록이 가능한 재질로 다시 구입해서 지붕을 반드시 '초록색'으로 씌워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성실히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잘못이 아니며 내 잘못이니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시골집을 구해서 이사하게 된다는 기쁨에 압도되어서 그건 이미 사소하게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저 이층을 올리는 게 좋아서 지붕색깔 쯤이야 별것 아니라고 생각되었던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초록지붕의 빨간 머리 앤을 잊고 있었던가 보다. 이미 앤이 된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 정말 그때는 두고두고 후회할 줄 몰랐다. 일하는 이들을 귀찮게 하지 않으며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어른다운 행동이라고 '좋게' 생각했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건축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고 맡겼지만 몇 가지 색과 조명에 대해서는 내 의견을 전했더랬다. 그런데 지붕을 빼놓았던 거다. 이층-지붕-앤-초록으로 연결되는데 나는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거지? 내게 퍽 의미있는 이 부분을 나 혼자 생각만 하고 있었단 말인가.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현실이 된다고 '믿었다면'... 어이없는 일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리 작동하고 있었다면 심각한 결여다. 초록지붕을 꿈꾸었으면서도 초록지붕을 실현시켜 줄 사람에게 정작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마술적이고 유아적 특성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몰론 그 동화적 실현은 상상이거나 환상구조의 일부로서 제 사명을 다 했다고 성큼 내팽개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어쨌거나 싸~한 현실감에 뜨끔히 잡아채이면서 초록 지붕집을 다시 짓게 될 거라 믿어야 했다. 집은 두 번 지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떠올리고 그 말의 힘에 의지하기로 하면서. 그렇게 단념했었다.


그리고 앤의 머리색과 비슷한 적갈색 지붕 이층에서 종종 창밖을 내다보며 초록 지붕의 앤을 생각했다. 보낼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앤은 유년기에 맘껏 뛰놀지 못한 까닭에 끝내 자라지 못하고 내 안에 갇힌 아이-나였다. 구조적 특성 가운데 하나임을 거듭 깨우쳐야 했다. 영원히 내 안에서 놀고 있는 진짜 아이 혹은 요정이라 믿으면서 불렀다가 떠나보내기를 거듭했던 앤, 루시 몽고메리의 앤Anne. 나와 우리의 앤은 그렇게 각자의 생을 스스로 길러가도록 도왔던 거다. 생후 석달 만에 부모를 잃고 따스한 양육의 손길과 사랑 세례를 받은 적 없음에도, 상상으로 수많은 자신을 창조하며 더없이 풍요로웠던, 누구보다 생생히 멀리까지 살아 볼 수 있었던 앤. 자신의 진수를 피워내고 제 머리에 스스로 기름 부은 놀라운 영혼. 누구도 상처 줄 수 없는 아이, 스스로 치유하고 보상으로 돌려버리며 아파도 거침없이 나아가는 여자. 그렇게 두려움없이 자신의 세계를 살며 시대를 뚫고나간 사람-Anne. 그래서 내게 오래 앤이 필요했던가 보다. 앤이 있어 (또 캔디가 있고 하니가 있어) 살만했고 더 살만했던 거다. 아직도 어른이 덜 되어서, 더 좀 되려고 앤을 애니메이션으로 드라마로 다시 보고 또 거듭 읽나 보다. 부끄럽지 않게 좀더 아이로 머무르되 정지하지 않고 점점 어른이 되고자 앤을 계속 부르는가 보다. 앤, 참 좋은 친구.


2

갑자기 성미와 진숙이가 우리집으로 출발했다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라는 나. 진숙이가 남편이랑 둘이 오려했는데 성미가 오늘 저랑 가자고 독촉했단다. 중2때 만나 같이 늙는 애들, 철없이 낳은 딸, 영원한 나의 아이들.

선생니~~~~~~ㅁ!!

어서 와~~~~~!! 이키키키키 부둥켜안고 방방 뛴다. 으흐흐흥응응


와~ 감동이예요. 선생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게 되다니요. 먹게 될 줄 몰랐어요. 세상에! 쑥국이라구요? 선생님이 쑥국을 끓이신단 말이예요? 그러게~ 난 몰라, 선생님 손으로 해주실 줄 상상도 못했어요. 선생님도 밥을 하세요? 그 기다란 곱슬머리 박경이 선생님이요? 이 김치도 담그신 거예요? 안 돼, 그건 아니죠? 누가 준 거라구요? 맞아. 선생님은 김치 같은 거 담그면 안 돼. 그래, 맞아. 히히히 맛있어요. 생채 더 주세요. 너무 신기해요. 이거 다 먹어야지. 진짜 맛있다......


통통통 느리지만 쟁쟁한 성미 음성과 진숙이의 낮고 빠른 목소리가 어느새 서로의 고저장단을 넘나들며 풀리는 추억과 상상에 윤기있는 색을 더한다. 우리는 가끔 누군가의 상상이 되거나 상상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밥은 감동이고 감동은 자주 먹이가 되고 숨줄이 된다. 우리가 함께 한 기억들만이 우리인 것을! 이제 정말 내 밭에서 가꾸어 해 먹이게 될 수 있으려나 보다. 사 먹일 때는 단지 지갑 열었던 것일까, 마음이 그것을 열게 했을지라도 마음보다 더 가까운 지갑이 제 먼저 열렸던 걸까. 이젠 마음이 더 커지고 더 활짝 열리려나 보다. 온몸으로 환대하라는가 보다. 그래~ 지갑만 여는 일은 다른 누군가 할 터이다. 어디서든 끊임없이 이어받고 있을 테다.


3

82년 봄. 진숙이와 성미는 도서위원으로 나랑 도서실 정리를 하면서 함께 더욱 즐거웠다. 오랫동안 정리되지 않은 학교 도서실의 책들을 점검하고 도서대장을 새로 만들었던 거다. 낡아빠진 몇 권의 도서대장에 기록은 되어 있으나 이미 없어졌거나 버려야 하는 수많은 책들을 가려내어 따로 폐기처분목록을 만드는 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진숙이랑 성미는 그 일을 마다 하지 않고 싫은 기색도 짜증도 없었다. 한 학년 아래 성호와 순희를 데리고 믿음직하게 살살 조금씩 오래 함께 기쁘게 해냈다. 그때 우리는 새로 나온 과자 다이제스티브를 참 많이 먹었더랬다. 고급스러운 과자로 꼽혔던 그걸 톡톡 분질러서 나눠 먹거나 사르르 녹여 색달리 깊은 맛을 음미하면서 우리는 서가를 더듬었다. 노래 부르며 에어로빅도 하고 돗수 없는 내 안경으로 장난도 쳐가면서 낱낱 서가에 있는 책들의 이름을 쓰거나 버릴 책들의 이름을 따로 길게 썼다. 등사지로 밀어 양식을 만들고 적었을까. 아마 자를 대고 줄을 그어 칸을 만들었을 것이다. 쓸수록 '똥' 묻어 나오던 볼펜으로.


이 힘들고도 즐거웠던 일을 하게 만든 교장이 어떻게 잊힐 수 있을까. 없어진 책들을 모두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겁주던 교장, 자신이 부임한 이후로 내가 도서실담당이었으니 내 책임이라는 거였다. 그렇게 엄포를 놨을 때 항변할 엄두를 내지 못한 나는 내 월급으로 몇 권이나 살 수 있는지를 걱정했던 2년차 교사였다. 이러다가 학교에서 쫒겨나면 뭘하나 겁이 나서 울기도 했다. 그 공포의 며칠은 서무과장 덕분에 어이없는 웃음이 되어 사라졌는데,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정리하는 고생만 좀 해달라는 것이다. 도서가 폐기대상이 아니지만 추진을 할테니 이참에 박선생이 한 번 대대적으로 정리를 해달라고 말했다. 심통스런 최아무개 교장의 개구리 눈알이 지금도 선하다. 그 박아무개 서무과장님은 보기 드문 진짜 공무원이었다. 방과후에 교실을 살피고 복도를 밟아보면서 손 볼 데를 찾던 그가 교장 같았다.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고 그런 행정실장을 본 적도 없다.


4

앤과 마릴라 같이 깊이 통하며 조용히 감싸는 친구, 성미와 진숙이. 그 지혜로운 두 사람, 마릴라와 매튜라고 해도 좋으리라. 여러 면으로 아주 다른 이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전적인 믿음이 그렇다. 그들의 엄청난 지지는 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니, 이 둘도 서로에게 그렇다. 안팎의 특성으로 보아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지만 비교하지 않는다, 서로의 삶을 지켜보며 서로에게 소중한 것들을 존중하고 수용한다.


얘들과 나도 그렇게 실뿌리 하나 붙어 있는 것일까.

그럼 나는 앤이라고 할래, 곱슬머리 앤.

앤을 따라, 각자 자신이 만든 제 이름을 당당히 부르며

앤과 함께, 떨면서도 용감히 생을 횡단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Thank you, Anne.

Thank you, Lucy Maud Montgom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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