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님 보시기에 좋았다 ①
분홍 옷 입은 뽕띠가 집을 바라보고 있다. 뽕띠에게는 실내를 향한 그리움이 있다. 안에 들어오고 싶은 갈망이 보인다. 놀다가도 수시로 집을 바라본다. 내다볼 때마다 현관이나 거실 방향을 보고 있다. 2층에서 마당을 내려보다가 뽕띠랑 눈이 마주칠 때도 많다. 우리에게 오기 전 7개월을 실내에서 키웠다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유년의 기억.
아주 가끔 기운 없어 보일 때, 제집 앞에 풀죽어 엎드려 있는 듯 보이면 급작스레 짠해진다. 까불며 물어뜯고 바스락거리며 돌아다니는 녀석이 잠시 그걸 멈춘 것일 뿐인데도. 너무 커서 서럽기조차 한 눈, 순하여 멍청함도 담긴 눈동자, 하늘로 말려 날아오르는 기다란 속눈썹을 마주할 때면 그것의 그리움은 아찔할 때가 있다.
뽕띠를 집안에서 키우지 않는 것을 속상해하는 딸들은 내가 개를 싫어한다고 믿는 것 같은데 그게 어쩐지 좀 억울했다. 지금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틀린 말은 아니나 부당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싫어하지 않는 것도 분명하다. 먹이고 돌보며 생명으로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나인데. 그런데도 미안함까지 느낄 때가 많은 나인데 말이다. 저희들은 한 번씩 어쩌다 집에 내려와서 안아주는 주제에 말이다.
“엄마 왜 그렇게 개랑 고양이 싫어해?”
그렇게, 싫어해? 내가 개를 껴안거나 만지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해도 되나...
“우리 어릴 때 햄스터 길렀고 새랑 흰 쥐도 키웠잖아.”
그랬지, 그렇다고 지금 내가 개와 고양이를 좋아해야 하는 건가...
"그랬지, 근데 내가 싫어...하나? 싫어하는 건... 아니지...? 좋지가 않은 거...지"
이렇게 스르르 떠오른 기억은 싸르르 밀려와 가슴 한복판을 뚫고 오르며 퍼지는 슬픔이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키웠던 우리집 똥개 아장이! 땅딸막하여 뒤뚱뒤뚱 아장아장 걸었던 우리 아장이. 수십 년 전 한국의 거의 모든 개가 너덧 예닐곱 개의 이름으로 통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때. 해피라는 '외국어'는 싫었고 복실이나 삽살이라기엔 털이 별로 없었으니 아장이가 되었다. 그래도 꽤 독특한 줄 알았던 그 이름을 이미 갖고 있던 개들이 많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 그건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쓰기에서 ‘냥고’로 이름을 붙여놓고는 으스댔던 것과 비슷했다. 100미터 미남이란 별명의 국어선생님이 내 글을 수업중에 읽을 기회까지 주셨으니 자뻑이 더했던 것 같다. 더욱이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분을 좋아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이고, 백미선생님께 내가 지은 죄가 떠오른다. 그때는 출석부 이름이 한자로 인쇄되어 있었는데 고2 학기초, 출석을 부르던 백미께서 황공하게도 이런 관심을 가져주셨더랬다.
“경이? 경사 경자에 두 이자네. 어떤 경사가 두 번이나 되니?”
“제가 태어난 게 한 번이구요, 제가 죽는 게 또 한 번이예요.”
착한 목소리의 익살이 아니라 자의식 가득한 목소리며 자세였음을 자인한 이후로 내내 창피한 풍경이었다. 생겨먹은 대로 나온 말, 뒷배경으로 밀어놓고 거듭 가리고 싶은 기억.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오직 유쾌하게 잊었을지라도 내가 기억하는 내 것으로는 부끄러움이다. 하지만 백미샘은 잊으셨을 거다. 왜냐하면 입을 절대 열지 않고 웃는 샘의 입꼬리가 귀에 닿아 입을 살짝 벌리지 않을 수 없었을 만큼 몇 번 볼록볼록 흔들렸을 정도의 위험상황에 봉착한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분은 귀엽게 어린것을 봐주고 잊었으리. 흠. 글 쓸 때 이렇게 중간에 다른 소재를 집어넣지 말라고 배운 것 같은데 생각이란 놈의 물고 물리는 꼬리를 잘라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여간, 오빠와 나의 그 아장이는 어느날 사라졌다. 학교에서 집에 오니 아무리 찾아도 기다려도 아장이는 없었다. 어떤 아저씨가 잡아갔다는 증언을 동네 아이로부터 들었으니, 한국사람이면 차마 왜냐고 묻지 못하는 이유였다. 내게 혐오,라는 단어 그 의미의 뿌리는 그렇게 심어졌다고 믿는다. 그런 짓거리조차도 생에 포함되는 지극히 작은 일부임을 그땐 몰라야 했으니까.
그렇게 찬란히 솟아 오른 기억에 따라 생각의 꼬리를 확확 땡기자면, 개나 고양이가 끌리지 않았지만 싫지 않았다는 거다. 선뜻 마음이 나지도 않았으나 굳이 싫다고 생각한 적도 없는데 뽕띠와 소리가 우리집에 느닷없이 오게 되자 걱정부터 앞섰던 거다. 안전과 미래에 대한 책임과 불안이 깔려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상하긴 했다. 막연히 ‘싫다’는 감정이 작동했고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보다 정도로 여겼는데 돌이켜보니 오히려 개랑 가까웠던 나였다. 장난치고 뛰어다니고 밥 주고 놀았지, 돌보고 키웠다. 무수한 생각의 꼬리들은 기어코 문제의 몸통에 해당하는 기억 하나를 건져내고 만다.
내 눈앞에서 죽은 조카의 강아지!
방에서 돌잡이 조카와 놀던 스피츠가 열린 방문으로 뛰어나오다가 멈추지 못하고 문지방 아래 물통으로 빠졌다. 부엌에서 일하던 언니가 아궁이에서 잠시 내려놓았던 끓는 물.....
부엌문을 들어서면서 정면으로 그 장면을 목격해야 했던 사람이 나였다. 열 살 무렵, 그건 내 심장을 낚아챈 사건이 아니었겠는가. 내 심장이 자주 벌렁벌렁하며 시원찮은 게 당연한 거다.
흑... 딸래미들과 나 사이에 말이 끊겼다. 내 말에 더 놀란 건 나였다. 내것 아닌 내것, 시뻘건 날것! 트라우마라는 것, 그렇게 관심과 마음을 싹 거둔다. 대상에 대한 모든 에너지를 불러들여 취소시켜 버린다. 내가 가진 언어로 해석할 수 없을 때 터진 감정의 둑에 압도당하는 폭력적 순간. 더이상 휩쓸리고 삼켜지지 않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차단시킨다.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엉뚱한 덮개기억으로 가린 다음 부정한다. 난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이제 개를 향한 사랑에 관해서 나는 무죄다. 땅땅땅!
하늘님 보시기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