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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이 Nov 21. 2022

수직으로 날아올라

길의 도시에서 길을 잃었으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예수의 얼굴-스테인드글라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부속박물관


고딕양식의 절정

첨탑과 함께 수직으로 상승하는 대성당

겹겹이 부드럽게 접히며 부서지는 선들 따라 

곡선도 직선인 듯 춤추며 날아올라

한 장 세밀한 투각이자 부조가 된다     


첨탑의 나선형 계단으로 솟아오르니 

수직,으로 새긴 글자의 의미가 아슬아슬 밀려온다

생의 한복판에 멈춰 선 듯 

꼼짝없는 아뜩함에 숨이 멎는다 a!

날개 없는 비상

하늘을 딛고 걸었으니 기적이다 

곳곳에 곧추선 성상들이 도왔나 보다        

 

손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꼭대기에서 마을과 거리를 훑는다

헌신과 노동이 영원히 완성해 가는 중인 주황이며 녹색들

더 좀 살고 싶다 나도, 다르게 살고 싶다 누구처럼

그래 수직을 내려가자 다시 332계단 142미터

3백 미터 허공을 용감하게 걸었구나     

                        

성당 부속박물관으로 간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방패인 듯

동그라미 한가운데 젊은 얼굴이 낯익다  

고요히 정면을 향한 맑은 눈길 

티 없이 편안한 아이의 눈빛

방패라면 적의 시선 교란에 효과가 있겠다

하지만 이런 예술품을 들고 전쟁을 했을까 

장식용 접시인가 대야는 아닐 테고 

무얼까 궁금하다 참 낯익다

부드러운 입매, 투명한 동그라미 눈동자 

누굴까 완전한 듯 모자란 듯


출구 찾아 뱅뱅 헤매다 떠오른 생각

예수의 얼굴이다, 맞다

그저 예수의 얼굴을 새긴 스테인드글라스

대야도 방패도 아닌 그냥 장식품 혹은 소망 

나도 이런 방패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걸

아마 그랬을지도 몰라. 이미 가졌지만

쓰지 못했는지, 장식만 하다 말았는지도 몰라    


박물관을 나오다가 <죽은 연인들>이라는 그림과 마주친다. 죽음에 대한 글마다 Memento mori의 상징처럼 망설이지 않고 인용하는 그림. 뱀이나 곤충들과 시체의 노골적 표현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죽은 남자 얼굴이 골룸을 닮아서 강하게 기억되는 그림이다. 물론 a의 장난이다. 이 그림이 여기에 있어서 안 될 까닭은 없지만 왜 스트라스부르일까 하던 참에 그것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이 도시의 핏빛 역사를 알게 되었다.   

   

1347년 흑사병이 전유럽으로 번졌을 때. 유태인들이 흑사병 보균자이며 페스트균을 퍼뜨린다고 지목되어 곳곳에서 학살되는가 하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으로 집단화형을 당하기도 했단다. 스트라스부르에서도 2천 명 가깝게 화형과 생매장을 당했는데 이때 유태인들은 차별이 덜한 동유럽 특히 폴란드로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삼 년 전에 폴란드의 오슈비앵침(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단어가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이었는데 덜컥 만나버렸다. 


인문학의 고장, 칸트의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유태인 학살이라니. 반유대주의는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체가 얽히고설킨 문제였던 거다. 모든 사회악은 유태인 때문이라는 책임전가. 내 안의 추함을 밖으로 내던지며 내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원시적 방어기제 투사. 한 집단을 악으로 몰아붙여 비난함으로써만 자신들의 우월감과 존재감을 느끼는 생존법. 그것은 오염에 대한 무분별한 두려움을 전염시키며 확산되기 마련이다. 차별이란 자신은 그들이 아니라는, 적어도 그들보다는 낫다는 식의 안쓰러운 자기 확인의 시작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차별과 멸시의 대상인 그들을 불러와야 한다는 것은 유태인 없이는 유럽인 자신을 모른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불쑥 관동대지진, 조선인, 우물, 독약이 떠오른다. 나를 만들고 우리를 만든 것들. 그것에 의해 다시 만들지고 있는 나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들의 삶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가. 재생산되는 무수한 a들... 나를 달고도 나를 피해 잠시 달아날 수는 있으나 인간의 삶을 피해 도망갈 길은 없다. 잘 헤매다 돌아오기 위해서 나로부터 멀어지고자 잠시 자리를 바꾼 것일 뿐. 그러니 여행이든 달아나기든 자신을 떼어놓기가 우선이다.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무섭고 강력한 것은 남이 아니라 나니까 말이다. 이런저런 이름의 자기감옥에 스스로를 가둔 채 굴러가는 나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변화나 변용은 스스로 결단하지 않고는 불가하다. 나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다시 내게 돌아올 길은 없다. 오래 의지하여 살았던 튼튼한 환상구조를 흔들어 균열을 내야 한다. 무조건적 용서와 껴안음만이 필요할 때까지.      


길의 도시에서 잠시 길을 잃었으나 길은 다시 이어지고 삶은 계속된다.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을 잊으며 잇는다.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며 골목길을 지난다. 아름다운 풍광마다 예쁜 집과 창문마다 탄성도 이어진다. 장미 향기에 젖으니 불 밝힌 남의 집 식탁이 공연히 그립다.

<예수의 얼굴-스테인드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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