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우리들의 인서트

by 노아

유난히 장마가 길었던 그 해 여름. 후텁지근하면서도 습기 가득 머금은 실외. 그 공기로부터 벗어난 아늑한 실내. 회색빛 짙은 장맛비가 창밖 너머에서 내리고 있었던, 어느 날. 창가 쪽에 앉아있었던 세레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뜸을 들이다 나를 보며 말했다.


“노아 씨는 절 언제부터 좋아하셨던 거예요? 노아 씨는..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실은 연애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해서요..”


순간, 거대한 추가 자신을 끌어당기던 중력의 실이 끊어지면서 지하로 쿵, 내려앉았고. 바닥에서부터 울리기 시작했던 충격파는 내 안을 가득 울렸다. 그 무게감에 순간 현기증을 느낀 듯, 안으로부터 먹먹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을 하였다.


“처음에는 호감이었어요. 궁금했어요. 그런데 점점 얘기를 나누다 보니 대화가 잘 통하고 재밌는 세레나 씨가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아껴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그때 기억나세요? 남산골 한옥마을 때, 세레나 씨가 했던 말씀이요..”


역시나 그때도, 어김없이 뿌옇게 회색빛으로 칠해진 대기. 그 대기 속에서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남산타워를 나란히 벤치에 앉아 바라보았던 그녀와 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지금 이런 모습인 걸 회사 사람들이 보면 놀랄 거예요. 어디 가서 이런 사람 소개받았다고 기분 나빠하시지 마세요..”


나는 그녀를 보며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세레나 씨는 예쁘시고 멋지신 분인데.. 오히려 이제야 세레나 씨 같은 분을 소개받아서 기쁜데요..”


“노아 씨는 연애 많이 해보신 거 같아요~ 리드도 잘하시고, 매너도 좋으시구요~”


아.. 아뇨.. 설마요? 연애를요? 아닌데..


이윽고, 나는 그녀에게 지난 연애에 대해 물었고. 그 질문에 세레나는 잠시 말이 없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별로.. 안 해봤어요.. 그런데 연애를 할 때마다 친구처럼 지냈던 거 같아요.. 설레는.. 게 없는 그냥 친구 같은 연애..”


그러더니,


“저는 제 스스로 쓰레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쓰레기라도 행복해질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세레나의 말에 이해를 못 한 채, 스스로 자책하고 낮게 생각하는 세레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세레나 씨의 말이 틀렸다는 걸 매일 증명하고 싶어요. 기회를 주세요. 매일매일 스스로를 쓰레기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게 하고 싶어요.. 진심으로.. 잘해보고 싶어요.”


나는 세레나의 손을 꼭 잡은 채, 우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 그때 말씀하셨던 첵스 파맛 가져왔어요~”


그리고, 가방에서 첵스 파맛 봉지를 꺼낸 나와 그 봉지를 보며 활짝 웃었던 세레나. 세레나의 웃는 모습에 나도 웃으며 그렇게 흘러갔던 카페에서의 시간.




그리고 어느새 찾아온 밤. 그 순간에도 가랑비는 그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헤어지는 길.. 집으로 가면서, 나는 이제부터 시작될 세레나와 함께할 나날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설렘에 행복에 감격하고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부모님께서 저한테 선을 보라고 하세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던 나. 뒤통수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스크에 가려진 그녀의 모습. 그러나 초점이 흐려졌던 그녀의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고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녀를 달래주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요.. 기다릴게요..”


그렇게 우린 한참을 걸었다. 백현마을에서 판교 현대 백화점에 다다랐을 때, 밤하늘 별이 흐릿해지고, 도시 속 조명으로 그 별빛이 쇠하기 시작했던 순간. 어느새 판교역에 다달았을 때였다. 세레나는 나에게 말했다.


“이 상황을 말할까 말까 고민 많이 했었어요.. 그냥 말하지 말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닌 거 같아서.. 말해요..”


이어 세레나는 말했다.


“여지를 주는 관계로 갈까도 생각했었는데, 그건 제가 힘들 거 같아서 여기까지 해야 할 거 같아요. 미안해요..”


나는 말했다.


“기다릴 수 있어요.. 언제라도요..”


“부모님을 설득해야 하는데, 오래 걸릴 수도 있고. 장담 못해요.. 그래서 기다려달라고 할 수 없어요..”


나는 시작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 그녀는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의 타이밍이 어긋나고 있었다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바보같이, 모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흐렸다.


내내 흐리더니 마지막까지 하늘은 야속하게도 흐렸다..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이번 생애에 연애하기는 글렀다? 나는 이제 사랑을 못하겠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의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더 이상 내 생애 단 한 번도 널 볼 수는 없겠구나.. 이런 직감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겠네요..”


우린 역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봤다. 어쩌면 마지막 밤이 될 수도 있는 날이다. 함께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서로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상황. 이해가 되지 않았고도 이해가 되어서 너무나 서러웠다. 그런 세레나를 보고 나는 말했다.


“한번 안아봐도 돼요?”


우린 안았다.. 꼭 끌어안았다. 어쩌면 우리의 연애 기간이 될 날들만큼 꼭 끌어안았다. 안으면서 나는 세레나에게 말했다.


“제가 너무 늦게 나타나서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나타났어요.. 미안해요..”


세레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는 그런 세레나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저앉아 눈물 흘리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저 안아주는 거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제가 노아 씨를 붙잡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분명 노아 씨는 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텐데.. 내가 붙잡는 건 아닌가.. 하고.. 놔줘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 많이 했어요.. 노아 씨를 놓치기 싫었거든요.. 붙잡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이어서 그녀는 말했다.


“노아.. 노아는 분명..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요..”


힘들고 외로웠던 나의 20대. 그 치열하고도 상처 많았던 9년이란 시간 끝, 29살에 이르러서야 생애 최고의 행복을 비로소 누릴 수 있었지만, 지금 나는 그 행복을 보내줘야 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원망하면서, 이렇게 만든 세상을 원망하면서. 그런 상황 속에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무력한 자신을 탓하면서.. 나는 그저 세레나를 끌어안는 지금이 영원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약속하게도.. 하늘은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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