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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Nov 11. 2021

다시 살고 싶지 않아

#살다 보면 살아진다#삶은 누구에게나 최선인 것#삶은 나그네 길


근 40년이 다 돼가는 소중한 만남이 있다.

20대의 싱그러운 시절 직장생활을 함께 한 선후배 모임.

일 년에 두어 번 인사동, 삼청동 나들이를 하며 지나온 얘기를 할 때면 

마음은 20대 그 시절로 돌아가 꼭 소녀들처럼 하하, 호호하게 된다.

물론 그 웃음이 그때 그 시절의 웃음과는 깊이가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게 웃으며 하루를 보내고 오면 다시금 삶의 활력이 생기고

다운됐던 일상이 재충전이 되곤 한다.

이제는 만날 때마다 다음에 또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깔려있긴 하지만 누구 한 사람 드러눕기까지는 이어가고 싶은 참 소중한 인연이다.


세 사람이 같이 하는 카톡방에

어느 날, 한 사람이 답답한 자신의 일상 중에 문득 직장 생활하던 옛시간이 떠올랐는지

"아, 나도 출근하고 싶어." 한다.

하하, 그 활기차고 싱싱했던 시절이 안 그리운 사람이 있을까?

나도 직장생활 시작한 딸을 회사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 

퇴근하고 활기차게 웃으며 나오는 딸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가슴 찡하게 부러웠었던가.

지금 이 나이라도 누가 써주기만 하면 그 시절처럼 똑같이 씽씽 돌아가며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들었었다.

젊음이란 그 당시에는 못 느낄지라도 인생에 주어진 특권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대뜸 반대의 답을 한다.

"나는 싫어. 나는 지금이 좋아. 그때로 돌아가면 또 살아야 하잖니. 나는 힘들어서 싫어."


 언니는 대학 갓 졸업하고 직장 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몇 년 뒤에 외아들인 남편과 결혼해 아들 하나 낳고,

직장일로 타지에 살아야 하는 남편 때문에 수십 년을 혼자서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들 하나 뒷바라지하며 사는데

하나뿐인 친정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청천벽력 같은 일에 남동생과 함께 사시던 친정어머니를 모시게 되었고, 

그 어머니를 오래 봉양하다가 몇 달 전에 떠나보내드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 때맞춰 해외여행도 하고,

늦은 나이에 경제적인 여유도 갖고 있는 언니.

아들 장가가서 귀여운 손녀도 보고, 직장생활 잘하고 있으니 그만하면 잘 살고 있는 삶이라 보았는데 

막상 언니는 자신의 뒤돌아본 삶이 너무 고되고 힘들었나 보다.

그럴 만도 했다.


언니는 효부상을 받아도 될 만큼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도 감탄할 만큼 정말 잘 모셨다.

그뿐인가, 부모 잃고 혼자 남은 조카도 친딸 이상 돌봐 결혼시켰고,

먼저 간 친정 언니, 남동생 대신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다 챙겨 왔다.

가히 슈퍼우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힘들면서도 그때마다 마음을 돌려놓고 삶을 잘 살아가는 언니를

부러워하면서 정말 존경했다.

그런데, 그렇구나.

언니는 지금이 제일 편안한 시기였다. 이런저런 일 다 끝나고,

나이가 70이 가까워지니까 편안해진 것이었다.

언니의 굴곡진 삶을 돌아보니 또다시 살기 싫다는 말이 이해가 되긴 한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나이에 그나마 편안해진 거였다.


삶이란 것이 생각한 대로,  계획한 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노래 가사처럼 그냥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

이제 이 나이에 되돌아본 삶에 만족하며 다시금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같은 삶을 또 한 번 되풀이하라면 손사래를 칠 사람이 더 많을 것 같은데...

그래도 아프고 고단한 기억 사이사이에 맑은 아이들의 웃음과 같은 작은 행복들이 끼어 있어서

우리의 삶은 유지되어 오는 것이 아닐까.

현재가 너무 힘들 때는 다시 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다가도

조금만 숨이 돌려지면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대부분의 공통 심리 아닐지.


삶은 고(苦)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고 그저 '삶'일 뿐.

모든 삶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음을 이제는 깨달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언젠가 이 삶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오면 잘 살고, 못 살았다는 평가는 치워 버리고

모든 생명들의 삶에  "참 애썼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언니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겠다 싶다.

"그래, 사느라고 애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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