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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리 Nov 11. 2021

바가지 친구

#물건도 정들다#살림살이#플라스틱친구


아주 아주 오래전, 결혼할 때 살림살이를 준비하면서 샀던 붉은색 플라스틱 바가지가 하나 있다.

쌀을  씻을 때 주로 사용하고, 야채, 과일을 씻고, 나물을 다듬어 씻기도 하고,

여름에 노각을 썰어 소금에 절여 놓기도 하고, 마른미역을 불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멸치를 다듬기도 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아 식구 많지 않은 우리 살림에 다용도로 쓰이는 정말 만능의 바가지.

색이 약간 바래서 오래 쓰인 관록을 보이지만 가끔씩 세제로 닦아주면 금방 새것처럼 말끔해지곤 한다.


30년을 넘어 40년 가까이 깨지지도 금이 가지도 않고 꿋꿋이 곁에 있는 이 바가지는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주방집기 중에 제일 싼 것일 터이다.

우리 가족이 외국생활을 할 때도 같이 갔었고, 돌아와서도 계속 같이 있는 물건.

결혼할 때 준비했던 주방물품들 중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계속 사용하는 물건이 그 바가지뿐은 아니다.

잘 깨지지 않는다고 샀던 코렐 접시들, 변하지 않는 은수저 세트, 나이프 포크 세트, 팔각 나무 상 등등...

모두 나에게는 식구 마냥 정이 든  물건들이다


그런데 유독 이 자그마한 플라스틱 바가지에는 색다른 감정이 묻어 나온다.

내 손때가 제일 많이 묻은 물건이고, 늘 사용하고, 아무것이나 담아도 묵묵하고, 

또 깨지거나 찌그러질 걱정을 안 해도 되고 (달리 말하면 못쓰게 돼도 아깝지 않은 물건인가?).

어쨌거나 하루 세끼 조리과정에, 또 간식 준비 과정에도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 이 바가지.

싱크대에 항상 놓여 있는 이 바가지 친구는 항상 편하고 정겨운 느낌이다.

오래된 친구 같고, 식구 같고, 모든 것 다 담아주는 엄마 같고...

묵묵히 세월을 견뎌온 어느 누구 같다고 하면 너무 진한 표현일까?

그냥 내버려도 아무도 집어가지 않을 낡은 플라스틱 바가지에 과도한 집착과 지나친 애정 투입인가.

그러나 사람이든 사물이든 오래 동안 곁에서 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묵묵히 있다면

어찌 깊은 정이 들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밥 안칠 쌀을 담고 싱크대에 조용히 있는 색 바랜 붉은 플라스틱 바가지.

내가 주방에 들어갈 수 있는 날까지는 같이 할 변함없는 친구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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