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불편하지만 솔직한 이야기

by 박유월

내 기억 속 차별은 어디서부터 꺼내볼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6살 아이였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충청도의 촌동네 중 촌동네에서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그 밑에 남동생 하나를 두고 있었다.

나에겐 모두 소중한 내 언니, 내 동생, 내 소중한 내 가족들.

내 부모, 내 할머니, 내 여섯 식구들 순수했던 여섯 살 아이의 푸른빛 마음은 몽글몽글하게 한 뼘씩 커 나아가고 있었던 거 같다.




모내기 철이 되면 아빠는 우리를 논가에 데리고 근처에 놀게 해 주고 당신께선 일을 하셨다.

우리가 농사를 짓던 그곳은 옆에 금강이 우렁차게 뻗은 지반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논가와 강 사이를 막아주는 둑을 흙 같은 것이 흘러내리지 않게 어떠한 볼록볼록한 것들로 깔아놓아져 있었다. 호기심 많은 나의 남동생은 마치 암벽등반을 하듯 그 볼록한 것들을 잡고 그 밑을 내려가며 스릴을 느끼는 것에 매료되어 위태롭게 놀이하였다.





"더 이상은 위험해! 내가 잡아줄게!!"





나는 남동생을 잡고 올려주었다. 천천히, 천천히 남동생을 끌어올려서 기슭을 타고 지반 위로 무사히 올려준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린 순간 아빠의 거대한 걸음이 성큼성큼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짝-!!!




아빠는 내 뺨을 매우 세게 후려쳤다.

귀에서는 이명 소리가, 아니 내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마음의 고동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얼얼한 뺨보다 어린 내 작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그 느낌을 삼십몇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뺨자국이 너무 크게 난 나를 보고 복귀 후 엄마가 아빠에게 되물었을 때는 귀한 아들을 내가 위험에 빠트렸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아닌데.





부모님은 크고 작은 것들로 성장 과정에서 딸자식과 아들자식을 차별하셨다.

아들은 무등을 태워주었으나 딸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아들은 자랑거리였으나 딸들은 창피거리였다.

아들은 허영쟁이로 키웠으나 딸들은 '감정받이'였다.

아들이 허용되는 것들은 딸은 '절대로' 안 됐다.

아들은 응원해 줄 수 있는 것들은 딸들은 '매질' 받거나 '손가락질' 받았다.





돈이 궁한 집안에서 짝퉁 가방이 창피해 눈이 빠지게 옥션에서 찾은 가장 싸구려 브랜드 가방을 샀을 때도 욕을 한 바가지 먹을 때 동생은 20만 원짜리 가방을 아무렇지 않게 샀다. 모든 차별은 그렇게 숨 쉬듯이 이루어졌다.

어떤 날 언니가 '차별'이라고 두 글자를 입에 올렸을 때 언니는 처참하게 쓰러진 듯 아빠에게 맞았다.

마치 나에게 본보기라도 보여주듯 그렇게 우리를 짓밟았다.




두 분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그 시대 '가부장적 아버지'의 표본으로 이틀에 한 번 꼴로 술을 마시고 와서 집안을 뒤집어 놓는 폭력적인 아버지 그 자체였다. 술을 마시면 엄마를 붙잡고 늘 싸움을 걸기 일수였고, 엄마나 우리를 잡고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는 둥 실로 엄청난 행동을 하시고-정도가 지나친 날에는 물건을 던지거나 부수고, 엄마나 우리를 때리기도 하셨다- 몇 시간 뒤에 곯아떨어져 잠이 드셨다. 우리는 공포의 시간을 보낸 뒤, 잠든 아빠를 뒤로 하고 술냄새가 진동하는 방에서 열 살이 견딜 필요가 없는 일들은 견디는 인생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면 술을 안 마신 날에는 괜찮으셨을까? 전혀 그럴 리가.





평상시에도 예민한 아빠는 엄마에게 늘 시비를 걸고 다툼이 일어나고 집구석이 안온한 날이 없었다. 우리는 엄마아빠 싸움을 말려야 했다. 말리지 않으면 엄마가 그것을 담아두었다가 우리를 때렸다. 아빠는 엄마를 잡고, 엄마는 우리를 잡았다. 엄마는 우리를 때릴 때 더욱 무자비했다.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때렸다. 모든 감정을 다 풀어서 자신의 그것을 풀었다. 딸들은 그렇게 엄마에게 맞아가며 고통스럽게, 비밀스럽게 엄마의 감정을 받아내 주었다. 그렇게 피라미드 서열은 아주 공고히 자리 잡힌 채 완벽하게 엉망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나와 내 언니의 깊은 한이 단 몇 문장으로 표현되니 지금 이 순간도 연하고 무력하다.




나는 가정이 싫어 도망치고 싶었다.

그럼에도 잘되는 자식 '타이틀'이 갖고 싶은 건지, 정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 다 잘 키워보고 싶으셨던 건지 우리의 학업에 끝까지 매달리셨다.-덕분에 그 감사로 부모를 끊어내지도 못하고 애증으로 보고 산다-

이 지긋지긋한 가정에서 벗어나고 나만의 가치관 속에서 살겠다고 선언하고 뛰쳐나온 건 교사가 된 이십 대 중반부터였다.




임용고시를 패스 한 후,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가장 아픈 부분은 당연히 나의 유년시절부터 비롯된 원적 가정의 상처였다. 삼 남매 중 둘째, 포지션도, 외모도, 학벌도 제일 별로였던 나. 제일 예쁨 받지 못했을 나를 우리 엄마아빠는 온전히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크게 밀려왔다.




마음이 아픈 자리에는 오랫동안 마른 풀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도 내버려 둔 채 내 상처를 보라고 부모에게 강하게 화를 내거나 부모에게 악을 질러논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행동을 종종 해왔다. 주로 엄마보다는 아빠에게 향했다. 엄마도 나에겐 모자란 사랑과 이 글에 다 적을 수 없는 체벌과 학대를 일삼았지만 그것이 아빠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러한 굴레를 몇 년이나 지겹게 돌면서 연애도 제대로 됐을 리가 없다. 나는 만나는 상대를 '아버지'에 투사시켜 그 분노를 해소시키려는 무의식적 행동을 일삼곤 했다. 원적의 가정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으면서도 정작 나는 오래된 끈끈이처럼 발이 묶여, 만나는 남자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다소 복잡한 연애를 했다. 몇 년의 연애문제를 겪고 심리상담센터에 발돋움을 했을 때가 되어서야,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나 같은 사람은?

비혼으로 살아야 하나?

아니면 기존의 가정을 버리면 행복해지나? 새로운 가정을 찾을 수는 있을까? 내 상태가 이런데?

대체 나는 어디서 답을 구해야 하나?

나는 내 의지가 아니었던 어린 시절의 나의 상처로 말미암은 모든 것들이 버거웠다.

그렇게 한 살, 한 살, 이십대의 꽃 청춘이 가고 나는 어찌할지 모르는 채 다소 엉망스럽게 또, 그 모양이 안쓰럽게 내 과거를 소리없이 소화해내고 있었다.





너처럼 나의 어릴 때도 가지런했으면 얼마나 예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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