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응. 알게 뭐야_자신감을 주는 말

by 오인환

유학할 때 일이다. 흔치 않던 한국인 모임을 참석한 적 있다. 그런 자리를 즐기진 않는다. 그 자리에 꽤 당찬 여자 아이가 있었다. 여자 아이는 똑부러진 성격을 가졌다.

'저런 건 너무 부럽다'

혼자 생각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에 나지 않는다. 한창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여자에게 훈계의 말을 했다. 둘의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진 않았다. 어린 여자는 한참을 듣다가 큰소리로 말했다.

"응. 알게 뭐야"

주변은 웃었고 장면은 짧게 지나갔다. 당사자도 기억하지 못할 순간이다. 그것이 나의 뇌리에 박혔다.

'알게뭐야' 비슷한 말로는 '그러던가 말던가'

어머니는 항상 '남의 눈치 보지 마라', '자신감 있게 행동하라' 하셨지만 다만, 그게 본성인지라 항상 남의 눈치를 봤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를 따지고 보면 자신감은 사라졌다. 내 행동이 어떻게 보여질까. 말투에 상대가 상처 받진 않을까. 무례한 사람으로 보여지면 어쩔까. 부탁을 거절하면 매몰찬 것은 아닐까. 그런 잡생각이 머리속을 어지럽게 쏘더니면 여자아이는 머릿속으로 나타나 말했다.

"응. 알게 뭐야."

쿨하게 관심없다는 듯이. 세상은 너무 많은 정보를 알려주려고 한다. 어려서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에 신경쓰고 살길 학습 받는다.

집에서는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씀 잘. 들. 어.라'

어른들 말씀 잘.들.어.라.

"너를 위해서 해주는 말인데..."

세상은 그런 것들로 가득차 있다. 서점에서는 알아야 하는 것들을 종용한다.

'10대가 꼭 알아야 할...', '20대가 꼭 알아야 할...', '30대에는 꼭 알아야 할...' 이런 시리즈는 반드시 성공하며 타겟은 40대, 50대. 심지어 60대까지 하고 있다.

"너는 유학까지 갔다 온 놈이 그것도 몰라?"

"책까지 출판한 작가가 그런 것도 모르시나요?"

"남자가 그런 것도 몰라?"

"어른이 그런 것도 몰라요?"


시끌벅적 알아야 한다고 아우성 치는 외부 세상에 대답하기 너무 좋은 말을 찾았다.

"응. 알게 뭐야."

신경쓰고 있다는 것은 에너지의 주체성을 그쪽에 내던지는 일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살 필요없다. 냉정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것은 우연히 내 눈에 보였을 뿐이다. 몰랐으면 몰라도 살았다. 한 번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예전 네 방을 정리하다가 무슨 물건이 나왔는데 버려도 되니?"

버리려도 된다고 말씀 드렸다.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모르고도 불편함 없이 살았던 걸 봐서는 버려도 된다. 인지하기 전까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아버리는 순간 그것은 존재한다. 고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챙기고 살 수는 없다. 그냥 버리고 모르고 살면 된다. 마음 쓰일 일은 수 만가지를 넘는다. 지나가다보면 '기부에 참여하라'는 경우를 마주친다. 흙탕물에 코 박고 물을 마시는 아이. 얼굴 가득 파리가 내려 앉아, 피골이 상접한 아이가 커다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자. 이제 그것을 알았으니 그것을 도와주어야 할까'

아니다. 대체로 '도덕'은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돕지 않는다. 기부라면 이미 하고 있다. 알고도 어떻게 무시하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따끔하게 말해준다.

"응. 알게 뭐야."

신문 기사에 누군가가 안타깝게 사고를 당한 기사가 나왔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제 그것을 도와주어야 할까.'

'아니다'

대한민국은 매 38분마다 한 명씩 자살하는 나라다. 집안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가족 구성원이 여성을 죽이는 '명예살인 사망 피해자'는 전 세계에서 연간 2만명에 달한다. 자살하는 사람의 뉴스를 보거나, 명예살인 사망자의 뉴스를 보고 이들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하는가.


'아니다'


그런 것을 도와준다면 홍보력 있는 '불운'만 겨우 도움을 받는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를 떠나, 얼마나 잘 홍보가 되는지. 그 마케팅력이 기부금 수준을 결정한다. 왜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려주어 죄책감을 강요하는가. 그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이를 비난하고자 한다면, 앞선 모든 케이스를 도와주고 비난해야 한다. 언급한 이상 비난하는 이 또한 자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남의 불행을 모른 척 하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신경쓰고 살 수 없다. 비 맞는 고양이나 강아지를 지켜봤다. 그것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고양이와 강아지는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던 생선을 잡아 먹었다. 그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이유는 다른 생명체의 생명을 앗았기 때문이 아닌가. 혹 우리는 가여운 강아지를 돌봐주고 식탁에 앉아 맛있는 치킨의 살갗을 뼈로부터 발라 먹길 기대하고 있진 않은가. 모든 기준과 조건은 설정하는 것은 일관적일 수 없다. 각자 자신만의 기준과 조건을 잣대로 두고 하는 평가한다. 전세계에는 80억개의 잣대가 있다. 자신은 설령 그것이 역설을 낳는다고 해도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실행하면 그만이다. 어치피 이타적인 모든 행위는 '역설'을 맞이한다. 어차피 역설적인 것을 인정하면 그냥 내가 하고 싶으면 한다는 것이 원칙이 되는 것이 맞다.

"실수하면 어쩌지?"

"강의가 오류가 있으면 어쩌지?"

"쓴 글에 맞춤법이 틀리면 어쩌지?"

"누군가가 나를 욕하면 어쩌지?"

"비웃으면 어쩌지?"

이때 여자아이의 말이 떠오른다.

'응. 알게 뭐야'

그러면 무지의 용기가 생겨난다. 무지의 용기는 뜨거운 불을 만지게 하고 위험한 곳에 달하게 하지만, 아주 확실한 모습으로 학습을 시키고 다시는 그러지 않도록 교육한다. 상처는 남겠지만 그것은 흔적이 되고 흔적이 곧 삶이다. 남들이 보거나 해보지 못한 것을 보고 하게 한다. 그러려면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응. 알게 뭐야"

그러면 조금 덜 차려진 모습으로 밖을 내다니는 아재가 돼도 별로 속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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