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단은 있다. 다만 두 극단은 무수하게 많은 점으로 이어진다. 고로 하나의 덩어리다. 수학에서 '위상동형'이라는 말이 있다. 위상동형은 본질적으로 같은 형태다. 위상동형이란 늘리거나 줄이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하는 모형을 말한다. 다시 말해 덧붙이거나 잘라내는 것 없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정도의 차이만 있는 모형이다. 여름철 수영장 튜뷰를 예로들면 적절하다. 튜뷰는 겨울이되면 바람을 빼어 종이처럼 얇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튜브의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름이 되면 그것에 바람을 다시 넣어 도너츠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일부를 부풀리고 늘리고 줄이는 등의 변화로 그 도너츠 모양은 '컵'모양으로도 변한다. 고로 위상동형은 본질적으로 같다. 손에 착용하는 반지를 살펴보자. 반지에는 손가락을 집어 넣을 수 있는 구멍 하나가 있다. 이 반지를 길게 늘여 빨대처럼 만든다고 해보자. 빨대는 입구와 출구라는 두 개의 구멍이 생긴다. 그러나 새로운 구멍을 뚫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빨대도 반지와 같이 구멍은 하나다. 이것이 위상동형이다. 결국 구멍이 두 개가 된 적이 없다는 말이다. 길게 늘리기만 해도 인간은 하나의 구멍을 두 개의 구멍으로 착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본질은 하나다. 다만 그것의 여러 위상동형의 형태를 를 보면 그 모양이 각각 다른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은 각각 입구와 출구의 다른 이름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없음'이라는 모양의 위상동형이다. 비어 있는 값에 마이너스 1과 플러스 1을 넣는 것이다.
수학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라고 정의했다. 그가 말하는 '수'라는 것은 자연수를 말한다. 인간의 눈으로 하나, 둘, 셋하고 셀 수 있는 단위의 수라고 여긴다. 그는 바닥에 깔려 있는 타일을 보며 직각 삼각형에 어떤 규칙이 있음을 발견한다. 세 개의 정사각형 타일로 가운데 직각삼각형을 만든다고 해보자. 이때 가장 큰 정사각형 한 변의 제곱은은 다른 두 정사각형 한 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등식이다. 이것을 '피타고라스의 정의'라고 한다. 이 발견은 역시 위대했으나 그의 제자중 '히파수스'는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직각 삼각형에서 짧은 두 변의 제곱의 합이 긴 변의 제곱이라고 하면 한 변이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를 구하기 위해선 제곱해서 2가 되는 값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최초의 무리수가 발견되지만 '히파수스'는 이 수를 발견한 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결국 제곱해서 2가 되는 수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루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처럼 수학은 등호의 양변에 같은 값을 더하고 뺀다는 규칙으로 수의 개념을 확장해 나간다. 결국 무엇을 더하거나 무엇을 빼도 등호가 성립된다면, 양변에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다음으로 발견한 수학의 법칙은 이렇다. 0을 제곱하면 0이다. 또한 0이 아닌 수를 제곱하면 0보다 크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1은 무엇을 제곱한 값일까. 논리대로라면 이 값은 루트 마이너스 1이 된다. 양변이 같다는 등호는 절대적 규칙이다. 그것을 해치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음수의 제곱도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음수의 제곱을 궁리하다가 우리는 '허수'라는 개념을 찾았다. 허수는 가상으로만 존재하는 값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i'라는 기호를 쓰고 실수로 표기한다. 이것은 복소수다. 복소수는 존재하지 않는 '허수' 때문에 다루기 힘들다. 고로 계산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켤레복소수'라는 것을 활용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하고 빼는 관계다. 이를 활용하면 허수는 사라지고 실수만 남는다. 이렇게 우리는 관측 불가능한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어쨌건 우주는 하나가 더해지면 하나가 빼지는 관계다. 여기서 절대규칙이 있다. 등호는 바꾸지 않는다. 우주의 절대값은 바뀌지 않는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반드시 에너지의 총량은 유지된다. 우주가 최초로 폭발하는 빅뱅으로 돌아가면 우주는 '양'과 '음'의 두 극단으로 폭발해 나간다. 고로 우주에는 물질과 반물질의 쌍입자들이 순간적으로 생성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다시말해서 우주의 텅 빈 시공간이 0이라고 하면 그것을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0이지만 그것을 양자 단위로 확대해서 보면 쌍입자는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을 무한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양자 요동 상태다. 그것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 불가에서 말하는 '공'을 닮았다고 해도 좋다. 스티브 호킹 박사가 했던 말 처럼 우주의 모든 양의 에너지와 음의 에너지 값을 모두 합하면 0이 된다. 우주는 결국 '무'와 '공'의 위상동형이다. 고로 '삶'과 '죽음'은 '없음'이라는 상태를 100년의 시간과 공간으로 늘린 위상동형이다. 단지 길이만 길어졌을 뿐이지 '없음'의 위상동형이다. '남자'와 '여자' 또한 무한대로 요동치는 양극단의 공간일 뿐이다. 거기에는 무수한 점들이 있으며 있고 없고의 사이에 중간 값도 존재한다. 다시말하면 이렇다.
남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남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신체적으로는 남성, 정신적으로는 여성인 상태
신체적으로는 여성, 정신적으로는 남성인 상태
신체적으로 남성이고 정신적으로 여성인 자가 여성을 좋아하는 상태.
신체적으로는 남성이고 정신적으로는 여성인자가 남성을 좋아하는 상태 등.
이처럼 정확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는 무수한 점도 역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이렇다. 음양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어디까지가 남성이고 어디까지가 여성이라는 것인가. 그것은 윤리의 문제를 포괄하여 복잡해진다. 뇌사와 식물인간은 살아 있는 상태인가 죽어 있는 상태인가. 정신이 남성이고 신체가 여성이면 남성인가 여성인가. 신체가 정신보다 중요한 것인가. 또한 정신적으로 여성이라면 어느 경계부터 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 양자 요동의 상태 중 멈춰지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들이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정의한 이후에도 끝없이 변하지 않는 진실 남는 것인가.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가리키고 거기에 이름을 정한다면 그 물의 이름은 그것이 되는가. 그 강물은 멀리서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리킨 순간의 물은 이미 흘러가고 없지 않은가.
결국 촛불하나 켰을 때 어디서 부터가 빛이 끝나는 지점인지를 지정하는 것처럼 그것은 아주 미세한 그라디에션이며 무엇이 무엇이라고 칼처럼 단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