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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다음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무조건 훌륭하다_어

by 오인환

손 하나 마디를 한 치(寸)라고 한다. 한 치(寸)는 3cm 정도되는 길이인데 다른 음으로 '촌(寸)'이라고 한다. 단위에서 가장 짧은 단위에 속하기 때문에 '한 치(寸) 앞도 모른다', 혹은 '세 치(寸) 혀가 사람 잡는다' 등의 속담으로 사용된다.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하는 '치(寸)'가 곧 '촌(寸)'이니 1촌(寸)을 뜻하는 부모 자식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부모 자식만큼 가까운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세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혀 끝도 세 치나 밖으로 나가 있으니, 한 치라면 내 몸보다 가깝다. 비유적인 표현이겠지만 그만큼 가까운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다. 요즘은 아이를 잘 낳지 않는 추세지만 보통 아이를 낳는다면 서른쯤 아이를 갖는다. 그 정도부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라는 하나 자아로 살아가는 듯 하지만 아니다. 어린 시기의 나와 현재의 나는 전혀 다르다. 개구진 아이가 조용해지거나 조용한 아이가 야무진 아이로 바뀌기도 한다. 외형만큼이나 내형도 바뀌는 것이 사람인지라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과거를 잊는 일에는 인간도 다르지 않다. 아이를 키우면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마치 시험 문제에서 틀린 오답노트를 들춰보는 것 같다. 잊어버린 기억이 새록 새록 떠오른다. 어느 날 편의점에서 아이가 불량식품 하나를 골랐다. 성인이 되고 결코 사먹어 본적 없던 불량식품이었다. 사실 성인이 된 뒤에 그 존재를 잊고 지냈다. 항상 들리는 편의점인데 나에게는 그 불량식품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가 그것을 가져오니 그것이 다시금 상기하게 했다. 어린 시절 나는 그 불량식품을 좋아했다. 아이가 아니라면 잊혀졌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면서 바쁘게 지나 온 과거를 그제서야 떠올리게 됐다.

부모는 자신이 결핍했던 부분을 아이에게 투영한다. 때로는 그것이 아이에게 부담이기도 한다. 이런 욕심은 아이가 부모의 과거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확실히 아이를 보면 과거의 내가 보인다. 아이에게 나무라거나 혼내키는 것은 어찌보면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행위와 같다. 아이와 나의 관계가 한 치 밖에 되지 않으니, 나에게 묻은 똥이 같이 묻고, 나에게 묻은 겨가 같이 묻었을 뿐이다. 한 번은 출강을 나가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 중 큰 후회를 하는 분을 뵌 적 있다. '교육'에 관한 내용이었다. 좌우 반전되어 있는 아이의 글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이의 그림은 종종 좌우 반전된 혹은 위와 아래가 반전된 경우가 있다. 다만 그것은 교육으로 바로 잡을 수 없다. 키가 다 자라지 못하고 몸무게가 늘어나지 않은 것 처럼 아이는 미성숙한 상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뇌 또한 완전히 자란 상태는 아니다. 아이의 뇌가 성숙하지 못한 것은 단순히 신체의 미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인지능 능력이 성인처럼 완전하지 못하다. 고로 뒤집어 있는 컵과 바로 서 있는 컵을 바라보고는 구별하지 못한다. 우리와 똑같은 것을 보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완전히 다르다. 교육을 하겠다고 아이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아이는 몹시 당황해 한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구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잘못했다고 지적 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의 인지능력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부모의 공감능력을 문제 삼아야 한다. 영화 '사도'를 보면 공감 능력이 부족한 아버지와 그것을 못견뎌 하는 아들 사이의 갈등이 나온다. 이 갈등이 현대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이돌의 숫자는 늘어나더니 TV를 켜면 비슷하게 생긴 이들이 늘어났다. 마치 안면인식 장애가 생긴 것처럼 '누가 누구던가' 하는 시기가 나에게 온 것이다. 어린 학생들은 이런 나를 보며 '어른'으로 생각할 것이다. 결국 아이라서 미성숙한 부분도 있지만 어른이라서 미성숙한 부분도 존재하는 것이다. 노화의 기준은 성장 이후부터라고 한다. 성장은 절정으로 치솟아 오르는 과정이고 노화는 절장에서 내려가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에는 비슷한 '미숙'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결국 아이의 미숙에 답답해 하는 모습은 이제 닥칠 자신의 미숙을 받아드리는 자세와 다르지 않다. 한 번은 아이와 미로찾기책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연필을 꽉 붙잡고 미로를 따라 줄을 긋고 있었다. 아이는 뻔하게 막혀 있는 미로의 끝까지 갔다. 벽에 부딪친 뒤에야 아이는 돌아나왔다. 아이에게 물었다.

"막혀 있는데 왜 끝까지 가?"

아이는 말했다.

"그게 나는 보이지가 않아. 그러니까 일단 가보는거야. 아빠는 답답해도 기다려줘."

그냥 봐도 막힌 벽인데 아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전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제가 아직 영어가 완전하지 못해요'

이렇게 말하고 다니던 유학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는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상대에게 인지 시켰다.

''그렇구나. 아이가 부족한 것을 보느라 내가 부족한 것을 보지 못했구나.' 아이에게 배웠다.

막 성인이 되어 성장이 완전하다고 착각하는 시기에 아이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이의 말은 아이의 입에서 나왔기에 무심코 놓칠 뿐이다. 때로 아이는 어른 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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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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