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는 말했다.
"모든 원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안다면, 다양한 운동법칙을 활용하여 그것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 수 있다."
내년 이맘때쯤 지구는 태양 둘레 어느 부분에 있을까. 꼭 미래를 가보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속도와 방향을 알면 말이다. 속도와 방향을 알면 가속도를 알 수 있다. 가속도를 알면 시간과 속도 그래프를 작성할 수 있다. 이로써 속력과 이동거리를 구할 수 있게 된다. 갑자기 웬 물리학인가 싶지만 어쨌건 원인과 결과는 연결성이 있다는 의미다. 인과관계를 따라가다보면 물리학이 아니더라도 미래와 과거는 들여다 볼 수 있다. 무조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모습은 알 수는 있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도 방향과 속도처럼 시작이 되는 인자를 찾으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파악할 수 있다. 집안, 학력, 말투, 행동. 다양한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 법칙을 불가에서는 '과보'라고 한다. 진행방향과 운동량은 다음을 예측하게 한다. '과'를 통해 '보'를 보는 방법이다. 과거에 쌓아놓은 '과'가 '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한다. 사람도 우주의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을 보고 과거를 알 수 있다. 또한 미래도 알 수 있다.
과거는 어떻게 현재가 되는가. 현재는 어떻게 미래가 되는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예를 들어보자. 병원에서 진료하는 유능한 의사가 있다고 해보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그의 학창시절에 유추해 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염소를 치는 학창시절은 갖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능력있는 가수를 만났다고 해보자.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과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어떤 과거가 있나. 물리학이 현재를 통해 과거를 추론하듯 추론할 수 있다. 적어도 음악을 경멸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능한 의사는 학업에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것고 능력있는 가수 또한 적잖은 연습과 감성을 키웠을 것이다.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대략적인 파악은 가능하다. 원인을 따라가보면 반드시 거기에는 출발점이 존재한다. 뉴턴의 '운동법칙'에 따르면 무언가를 바꾸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저항이 생긴다. 진행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를 바꾸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냥 그렇게 된다는 것은 없다. 움직이는 물체를 멈추게 하려면 반드시 힘을 가해야 한다. 이처럼 습관이나 현상을 바꾸려면 반드시 저항을 맞이 한다. 매일 9시에 일어나던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갑자기 7시에 일어나겠다고 다짐하면 그것은 가능할까. 가능하다. 다만 바로는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저항이 생긴다. 뉴턴의 법칙에는 관성의 법칙이 있다.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와 방향으로 움직인다. 사람이 식습관을 고치기 어려워 살이 빠지지 못하거나 글을 보는 습관이 글들여지지 않아 학업성적이 좋지 못한 것 처럼 말이다. 지속된 습관은 현재의 나를 만들고 미래의 나도 결정한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스스로 결심해도 언제나 저항이 생긴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내가 진행시킨 방향이다. 그것은 저항을 주지 않으면 언제든 같은 방향과 속도로 움직인다. 다만 거기에 저항을 주거나 다른 에너지를 준다면 그것은 언제든 변화한다. 현재의 직업, 능력, 소득은 고로 과거의 내가 지은 '과'에대한 '보'다. 지은 인연에 대한 과보는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현재의 나를 보고 과거의 나를 반성하고 후회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미래의 나 또한 현재의 나로 인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거기에는 적잖은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저 그렇게 되도록 두는 것은 진행방향을 바꾸지 않으며 다른 곳에 도달하겠다는 욕심이다. 그것이 욕심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누군가의 작은 습관을 고치는 것은 어떤가. 우리 스스로도 작은 저항에 이기지 못하여 진행 방향을 지속한다. 반면 때로 우리는 타인의 작은 습관을 고치려 한다. 모든 원자가 각자마다 진행방향과 속도가 다르듯, 우리 인간도 각자 다른 삶의 방향과 시선을 갖고 산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우리는 사소한 문제를 문제 삼는다. 누군가의 작은 습관을 고치려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들 또한 아주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관성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 관성을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지금 당장 자신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이를 바꾸려는 것은 고로 큰 욕심이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타인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자신을 살펴보자. 바뀌지 않는 타인을 바라보며 다시 자신을 바라보자. 타인을 불편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조차 바꾸지 못하면서 타인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모순되는 일인가. 고로 자신이 오직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 뿐이다. 시선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관성을 갖는다. 관성은 진행방향을 지속한다. 어떤 시선을 가지고 살고 있느냐는 결국 운동 방향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밝은 방향? 혹은 어두운 방향? 방향과 속도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