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행복'에 화두를 던진 '붓다'는 결국 고(苦)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고민을 거듭해봐야 '괴로움'이라는 답에 도달한 것이다. 행복은 신기루다. 인간이 모두 행복했다면 인류는 조금의 발전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불만족은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발버둥을 만들어냈다. 고로 '하이테크놀로지'라는 현대 문명은 수많은 고통의 산물이다. 영어에서 행복의 어원은 '우연히 발생하다'와 같다. Happy와 Happen이다.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행복'인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거짓'에 가깝다. 동서양이 우연하게 언어를 공유해서 그럴까. 혹은 우연히 산발적으로 닮아졌기 때문에 그럴까. 알 수 없지만, 한자에서 행복의 행(幸) 또한 '뜻하지 않게 발생하다'라는 의미다.
인간의 대중지성은 '언어'에 녹아져 있다. 우연히 '동양과 서양'이 '행복'이라는 단어에 같은 어원을 사용한다. 여기서 핵심이란 '뜻하지 않는, 우연한'이다. 행복이란 아주 갑작스럽게 찰라의 순간에 찾아왔다 나가는 감정이다. 바람과 같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진다고 해서 행복이 영원히 머문다는 것은 없다. 행복은 언제나 머물지 않고 갑작스럽게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린다. 그것은 '행운'과 같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행운을 움켜 쥘 수 없다.
애초에 '행복'이라는 것은 움켜 쥘 수 없다. 없는 것에 있다고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이 '추상명사'일 진데, 이제 인간이 다시 언어에 속아 그것이 있다고 착각해 버린다. 이름을 짓고 나면 그것이 있다고 착각한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이해하기 힘든 세상을 인간의 지성 단위로 난도질하는 일이다. 책상의 대략 절반에 연필로 선을 그어 놓고 그 경계부터 내것이라고 정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을 긋는 것도 자신이고, 그것이 이제 자신의 영역이라고 믿는 것도 자신이다. '자연'이라는 원대한 덩어리 안에서 그 선 따위는 어떻게 그어지던 중요치 않다. 이렇게 모호한 것을 인간의 지성 크기로 난도질 하는 것은 '언표'라고 하는데, 행복은 이런 '언표'가 가저 온 모순일 뿐이다.
공기 중에 '후'하고 바람을 불어보자. 내 한숨이 공기중으로 퍼져나간다. 이렇게 퍼져나온 한숨에 이름을 붙여보자. 어디서부터 바깥공기이고 어디서부터 한숨일까. 알 수 없다. 그것은 정의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한숨의 가장지리와 가장자리의 가장자리는 무엇으로 구분할 것이며 그 모호한 것을 칼처럼 나눈다면 그것은 과연 그것이 되는 것일까.
행복은 이처럼 모호한 관념 상의 존재일 뿐이다. 이 또한 '신기루'이며 '환영'일 뿐이고 용, 봉황, 유니콘처럼 '상상' 속의 존재일 뿐이다. 없는 것에 이름을 지어 놓고, 모두가 그것을 지향점으로 두고 있으니, 모든 이들이 '비교대상'을 갖게 되고 비교는 '불행'을 낳는다.
확실히 행복이 관념이듯 불행도 관념이지만, 불행은 행복과 다르게 '다다르기 위한 이상향'이 아니기에 더 광범위 하게 존재한다. 무슨 말인고 하니, 행복은 정점이고 불행은 과정이다. 우리는 행복을 이상향으로 둔다. 그것에 목표지점을 두기에 그것은 짧고 찰라의 순간이다. 반면 그 대척점을 모두 불행이라고 두기에 만인이 불행하다는 함정에 빠진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고 한들 '꼭대기'는 한점일 뿐이다. 한점을 밟지 못하는 수만 발자국을 불행이라 두기 때문에 삶은 불행으로 가득찬다. 행복만 그럴까. 그렇진 않다.
실패와 성공도 그렇다. 실패은 과정이고 성공은 정점이다. 성공은 수많은 실패의 발자국에 쌓여진 한점일 뿐이다. 그러나 성공에 다다르는 모든 과정을 '성장'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실패는 성장이고 성공은 정체다. 한낱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 '성공'과 '행복'이라는 추상적 관념에 빠져 살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을 살아라. 삶은 (苦)이고 그 중에 행(幸)을 잠시 보는 일이다. 중요한 정보만 머릿속에 넣고 살면 그것이 행복으로 가득찬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