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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프랑스 책벌레와 이혼했다_오르부아 에두아르

by 오인환

세상에는 딱히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된 일들 투성이다. 어차피 계획하고 의도하는 바대로 되는 것이 없다보니, 계획이나 의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회의감이 마구 들다가 문뜩 다시 떠오른다. 문제는 계획과 의도가 아니다. 그 결과까지 완전하게 자기화하고 싶어했던 욕심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과를 초월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다시 계획을 세우고 의도를 채운다. 원하는 결과를 위해 계획과 의도를 갖고 결과가 원하는 바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초탈한 마음을 가지려 한다. 다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다면 세상 어떤 사람이 좌절을 경험하고 미련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장하게 되나.

역시 인생은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이고 배움이라는 것은 '뇌'라는 신체기관에 '인'을 새기는 작업이다. 같은 자리를 수 백 만 번 떨어져 자리에 '인'은 새기고 나면 그것은 딱 새긴 기간만큼만 인이 박혀 있다. 고로 중요한 것은 이 말랑거리는 '뇌'라는 신체에 얼마만큼의 '인'을 새길 시간과 정성이 있느냐다.

모든 그렇다.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그렇다. 20대 초반, 해외로 유학을 떠났을 때, 그곳에서 10년을 살게 될 거라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얼마 정도를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싶었다. 역시나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그곳에서 대학을 다니고, 첫 직장을 얻었다. 단순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은 점차 '직업'으로 굳어졌다. 그러려고 그랬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영주권'을 신청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런 이유로 갈등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그 나라에 갔던 이유는 '이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어머니께, '3개월 영어 좀 공부하고 올께요.' 4년을, 다시 일주일 휴가를 왔다가 나머지 수 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생각보면 황당할 노릇이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 얼마 뒤에는 해외생활과 그렇게 몇번의 인연을 갖다가 지금은 다시 '제주'로 내려와 있다. 이처럼 말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영어에서는 'fortune'이라고 부른다. force라는 말이 '힘'이라, 어원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운'이라고 부르는데, 흔히 우리는 그것을 '행운'과 같은 의미로 상용한다. fortune이 아니라 luck에 가깝다. luck은 라틴어에서 기원한 빛, 즉 light와 어원을 같이 한다. 다시말하면 luck은 반짝이는 것이고 fortune은 거대하게 무더기 같은 것이 웅장한 움직임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거기에 그래서 동양에서는 이런 운에 '움직이며 돌아다니다'라는 의미의 글자를 사용한다. 그러한 '운'의 거대한 목적, 그것이 '운명'이다.

살다보면 만나고 스쳐지나가는 무수하게 많은 인연들이 있다. 한때는 그들과 영원할 것 같아, 미워했고 극성 맞았고, 시기했고, 안달했다. 그 순간이 영원이라고 여기던 그 당시의 그 모습은 지금 돌이키면 풋내기 어린 아이의 치기 같은 것이다. 마치 '돌아오는 길에 사줄께'라는 말로도 견디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고집 같은 것이다. 그때보다는 몇 시간 정도 더 성숙한 내가 그때의 나를 봐도 그리 어린데... 라고 여기다가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더 성숙할 시기가 남았기에, 결국 언젠가 생각은 돌고 돌아 그때가 맞다는 더 깊은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 같다. 가장 멀어지면 결국은 다시 가장 가까워지는 원형의 시계 바늘 같은 것이다.

'끝'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끝'이라는 것이 '시작'과 가장 멀리 있는 지점이라 여겨지는 때가 있다. 그러나 끝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끝은 '마무리'다. 아무리 좋은 책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출고되지 않는다. 어떤 음악도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이름'이 붙어지지 않는다. '펜'을 잡으면 '펜'을 놓으며 작가의 글이 완성되고 잠자리에서 일어서면 다시 잠자리에 누으며 하루는 완성된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마무리'다. 마무리의 어원은 '끝 말'이라는 한자에 '무리'라는 순 우리말이 붙은 단어다. '무리'는 다시 말하면 '모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다시 말해, 끝은 '시작'을 포함하여 모든 과정을 '모은' 완성체다.

'위상동형'이라는 말이 있다. 복잡한 공간이나 네트워크를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DNA라던지, 단백질 구조, 서울 지하철 노선처럼 실제 구조가 복잡한 것에서 형태와 공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강남역과 양재역은 노선도 상에서는 매우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 그 두 역 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 홍대입구역과 신촌역도 노선도에서는 가깝지만 걸어 이동하기 쉽지 않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 종로3가역도 그렇다.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실제를 왜곡하여 거리를 늘이고 줄인다. 그래도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위상동형'에 따르면 강남역과 양재역의 거리가 축소된 것처럼 간소화하고 축약하고 직선화하는 등 바꿀 수 있다. 즉 붙이거나 자르는 행위없이 늘이거나 줄이는 등의 행위만으로 모양을 바꿀때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따르면 반지와 빨대의 모양은 서로 같다. 반지를 길게 늘이면 빨대와 같아진다. 즉 반지일 때는 하나였던 구멍이 빨대가 되면 2개의 구멍인 것처럼 보이는 일이다. 영국과 프랑스에 연결된 해저터널을 보면 흥미롭게도 켄트 주 폴크스턴에 있는 영국측 입구와 노르드파드칼레 지방의 코켈에 있는 프랑스 측 입구가 두 개 있지만, 이것은 그 길이만 늘였을 뿐 실제 구멍은 하나다.

만남과 이별이라고 다르지 않다. 만남과 이별은 별개의 무언가처럼 보여진다. 시작과 끝처럼 보여진다. 다만 이는 '과정'을 늘였을 뿐 결국 하나의 구멍이다. 입구가 출구이고 출구가 입구일 뿐이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가지 못하는 구멍은 없다. 나가기만 할 수 있고 들어갈 수만 있는 구멍은 없다. 결국 모든 것은 1과 마이너스 1사이의 길이를 늘이고 줄이는 0의 위상동형이다.

사람이 그렇다. 길이가 짧을 때는 하나로 여겨지는 무언가가, 길이가 길어질수록 둘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것은 그것의 본질이 아니라 '길이'의 차이일 뿐이다. 고로 이별이 있는 이유는 만남이 있기 때문이고, 만남이 크다면 이별도 크다. 이별이 크다면, 그 상처로 견디지 못할 아쉬움과 그리움이 사무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만큼의 사랑을 이미 받았었구나..."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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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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