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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발] 내 글이 똥 같은 이유_나의 하루는 세 번 시

by 오인환


백기불여일성 천사여불여일행(百技不如一誠 千思不如一行), 백 가지 기술도 한 번의 지극한 정성만 못하고, 천 번의 생각도 한 번의 실행만 못하다.



5년 간, 책을 읽고 블로그에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 날짜로 889권의 도서 목록이 블로그에 기록되어 있다. 2020년에는 236권, 2021년에는 226권, 2022년에는 231권이다. 2023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 오늘을 살펴보니 184권이 기록되어 있다.



나의 블로그는 오롯하게 '나만을 위한 기록'이었다. 2019년에도 그랬고, 2020년에도 그랬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부터, 댓글에 이런 내용이 올라왔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시면 스마트폰으로 글을 읽는 사람들이 불편합니다. 개선해주세요."



나의 글은 '무더기'처럼 쌓여 있다. 적당하게 사진을 섞고 알록달록 색상을 넣지도 않는다. 친절하게 '말하는 투'로 쓰여 있지 않다. 그저 생각한 것을 '무더기'로 쌓아 올려져 있다. 그러니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쓰여진 글은 '퇴고'도 없다. 그저 '일필휘지' 자리에 앉아서 '후다닥'하고 PC를 꺼버린다. 그러니 어느 날, 원서를 읽은 뒤의 글을 썼을대는 이런 댓글도 달렸다.



"작가라는 사람이 맞춤법, 띄어쓰기도 못하나요? 책임감 좀 가지세요. 영어 전에 국어부터 공부하시죠."



얼굴이 붉어졌다. 이유는 실제 나의 무지로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들었다. 나의 글을 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언젠가 블로그에 유입하는 경로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독알림'을 통해 들어 왔다. 일부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문장을 가끔 필사한다고도 했다.



참으로 희안한 것이 나의 블로그는 특별하게 꾸미지도 않고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슈성이 강한 글은 일부러 시기를 놓쳐서 쓰기도 한다. 내 블로그의 제목이 '개인 해우소'인 것을 있어 보이게 말하면, '걱정을 해소하는 곳'이고, 말 그대로 하면 '똥을 싸질러 놓는 곳'이기도 하다. 블로그 이름을 지을 때에는 특별한 철학을 담은 것도 아니다. 그냥 '막 싸질러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나를 알았다. 나는 깨끗한 책을 보존하기 위해, 책을 깨끗이 보려는 편이었고, 새로 산 연필, 지우개, 공책도 모두 깨끗하게 사용하고 싶어했다. 그러다가 중학생 정도에 '아차'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공책'을 깨끗이 사용하기 위해, 첫장부터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글씨체가 흐트러지면, 처음 몇 페이지를 찢고 새로운 공책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멍청한 일이던가. 나는 그 이후로 '새것'을 사면 그 바로 첫날, 일부러 막 다룬다. 새 옷을 사건, 새로운 스마트폰을 구매하건, 새책을 사건, 새차를 사건 그렇다. 그것의 본질이 사용이라면, 그것을 편하게 사용하기 위해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대상에게 '주종' 관계를 확실하게 잡아주고 그것을 편하게 사용하길 바랐다.



블로그에 '똥간' 같은 이름을 지어 놓은 이유도 그렇다. 아마 조상들이 자신의 아들 이름을 '개똥이', '소똥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막써야 편해지고, 편해야야 막쓰게 된다. 그런 시작으로 나의 글에는 언제나 똥을 싸질러대는 마음으로 쓴다. 그것이 내가 블로그를 5년 간 유지할 수 있던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열심히 하면 안된다'라는 이상한 철학을 갖게 됐다. '열심히'라는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단어 때문에, 간혹 우리는 그 자체에 심취한 자신에게 기대와 이상을 심는다. 그 자아도취가 완전하게 자아의 형상을 만들어내면 언제나 그에 합당하지 않은 결과를 받아 들인다. 모든 것은 '지속적인 우상향'이다. 고로 자신의 '열심히'하는 모습에 '도취'되어 '열심히'라는 착각에 빠지면, 결과라는 현실의 잣대에 몽둥이질을 당한다. 결과가 어찌됐던, 그냥 아쉬울 것 없이,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냥 결과가 주는 몽둥이가 '매값'이 없어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던, 그냥 아무런 심리적 데미지 없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냥 해야 한다. 그냥 변소간을 드나들 듯,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도취 없이, 그것이 커다란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도 없이, 그저 해야 한다.



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남이 한 번에 잘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 이는 중용에서 나오는 말이다. 남들과 비교할 것도 없다. 결과에 연연할 것도 없다. 남들이 화장실 한 번 더 갔다고 기를 쓰고 화장실을 더 가지 않는 것처럼, 나의 생체적 리듬에 맞게 그것을 해내면 그만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대단하지 않게 여기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하는 일을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하찮지 않게 여기던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똥간을 갔다오듯 해 낼 뿐이다. 그저 읽고 그저 쓴다. 그저 먹고 그저 싸는 것처럼 말이다.



블로그에는 읽은 책만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야 할 내용을 기록하는 '메모장'이기도 하고 다짐을 다잡는 다짐장이기도 하다. 감사일기를 쓰는 '감사일기장'이기도 하고 스스로 긍정적이도록 독려하는 확언장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상을 적는 육아 일기이자, 나만의 육아 노하우를 공유하는 육아컨텐츠이기도 하다. 내 투자에 대한 공부를 하는 '투자일지'이기도 하고, 사회 현상과 경제를 분석하는 '컬럼'이기도 하다. 출판사가 출간 문의를 해오면 사용할 '컨텐츠 출처'이기도 하고 나를 홍보하는 브랜딩 홍보장이기도 하며 유튜브의 대본이자, 출간 도서의 원고이기도 하다.



블로그에는 어렵게 얻게 된 노하우와 기술, 정보를 가감없이 기록한다. 여기에는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인 '선행'이 1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도움을 받으면 좋은 일이고 오직 스스로를 위할 뿐이다. 성장하는 이는 아무리 막아서도 어떻게든 성장하고, 정체할 이들은 아무리 끌어내도 정체하게 되어 있다. 나만의 노하우와 비밀을 아무리 틀어먹아도 성장할 이들은 성장해 낼 것이며, 멈춰 있으려는 이들을 아무리 밀어도 그들은 정체할 뿐이다. 여기서 나의 역할은 감사하게 성장하는 이들의 자양분으로써 사용될 뿐이며, 그것이 좋게 쓰여지는 '퇴비'이자 '똥'의 선순환이지 않을까 싶다.



나의 독후감은 '책'의 요약이 없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없다. 책에 대한 내용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을 때도 있다. 그저 나는 책을 읽으며 무엇을 느꼈는지를 기록할 뿐이며, 그저 잘 씹고 소화하여 뱉어버린 똥 같은 글일 뿐이다. 고로 나의 글을 욕하더라도 나의 글에 대해서는 단 1의 정신적 데미지도 입지 않는다. 내가 싼 똥들이 좋게 사용되어 세상에 거름이 된다면, 다시 그것이 나를 키워내는 퇴비가 된다면, 이 얼마나 순도 높은 효율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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