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장점은 살아보지 않은 삶을 겪어보는 것이다. 2006년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라는 소설을 읽었다. 책은 인식의 변화를 줬다. 주인공은 '살안자'의 동생이다. 살면서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입장이다. 게다가 '살인'이라면 어떤 변명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가 아니던가. 다만, 선과 악은 그렇게 칼로 무자르듯 잘라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악마'라기 보다 매우 인간적이었다. 느낀바는 이렇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그 입장을 알 수 없다.'
사람은 보는 만큼 성장한다. 조선 시대의 누군가가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을 갖고 있더라도 '화성이주'를 생각해 낼 수는 없다. 결코 알지 못한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을 할 수는 없다.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를 확장할 뿐이다. 고로 사람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것은 매우 각별한 경험이다.
2022년 한해 동안, 대한민국에서는 585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585건의 사건이다. 이는 '피해자'뿐만아니라 '가해자'도 만들어 낸다. 즉, 한해 1000명이 넘는 살인 피해자와 살인 가해자가 만들어진다. 성폭력은 3만건, 그러니까, 6만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매녀 만들어진다. 절도는 27만 건이다. 이또한 50만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만들어진다. 고로 그 만큼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1922년 소련 최고 위원회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 백 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다."
숫자는 비극의 크기를 함시하지만 그것은 깊이를 말하진 못한다.이 비극에는 감정이라는 깊이가 철저하게 배제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선을 행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에도 여지는 존재한다. 비록 많은 이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 지라도 각자 자신만의 이유를 가진다. 고로 이유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그렇다. 최초에는 사건을 다룬다. 다음에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이후부터 명확한 '선과 악'이 등장한다. 명확하게 '나쁜 사람'과 명확하게 '좋은 사람'이 나눠 등장한다. 다만, 진행하면서 작가는 각각의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모든 인물의 과거나 내면으로 들어가면서 그 인물이 행동한 이유의 인과관계가 펼쳐 보여진다. 비로소,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한다. 물론 여기서 '그럴수도 있겠구나'하는 것은 '상황상'을 말한다. 모두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선과 악은 존재한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개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선한 인물도 수없는 살상을 해치는 악인이다. 농장주는 어떤 면에서 '선하고 근면한 인물'로 보여지지만, '환경' 혹은 '자연'의 측면에서 사악한 인물로 보여진다.
고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이처럼 다면적인 것이 인간이다. 고로 현상이나 상황을 그려내는 것보다 '내면'을 그려내는 것이 훨씬 복잡하고 흥미롭다.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 그럴싸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도 이를 알려준다. '악의 평범성'은 유대인 말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제시한 개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공무원일 뿐이다. 다만 그 결과는 '악'이 된다. 고로 악의 근원은 평범한 곳에 있다고 '한나 아렌트는 주장했다. 이는 악의 근원을 찾는 과정에 제시된 개념이지만 더 깊게 따지고 보자면, 본래 '악'은 외부적으로만 보여질 뿐이다. 존재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민의 29.8%가 전과자다. 다시 말해,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전과자다. 현재 대한민국 교도소 수감자수는 5만명이다. 다시말해, 지금 이순간 교도소에서 수감 중인 사람은 1000명 중 한 명이다. '전과자'를 나쁜 사람이라고 정의하면 대한민국에 선한 인물은 셋 중 둘 뿐이다. 수감자를 1000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1000명 중 한명은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을 모두 나쁜 사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범법 혹은 범죄와 '악'은 같지 않다.
모든 '악'을 '악'으로 정의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악'과 '선'이 공존한다. 우리는 내면을 보지 못하기에 그의 겉모습으로 '악'과 '선'을 구분한다. 그 사람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우리는 그 내면을 보지 못한다. 그저 가늠하거나 넘겨 짚을 뿐이다. 각자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 이느 공간에서 만나게 된 단면끼리 그 역사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나를 보더라도 그럴 것이다. 예전 미국의 TV광고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한쪽은 우울해 하는 인물이 있고, 한쪽은 스포츠를 관람하고 소리를 지르며 평범한 삶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이 대조되어 있었다. 그 광고는 결국 '우울증으로 자살한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스포츠를 관람하고 소리를 지르며 평범한 삶을 즐기던 사람이 갑자기 삶을 떠났다는 이야기었다. 그렇다. 내면은 모른다. 고로 소설의 가장 특장점이라고 한다면, 누군가의 복잡한 내면을 아주 잠시라도 훔쳐 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