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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an 26. 2024

[생각] 기록하지 않으면 행위에 불과하지만, 기록하면





 물이 되지 못하고 구름이 되지 못한 수증기가 모호하게 지표면에 걸쳐진다. 떠오를 것은 떠오르고 가라앉아야 할 것은 가라앉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꼭 머릿속 같다. 차분히 가라앉혀 침전시키고, 차분히 증발시켜야 띄워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다. 바람만 없어도 증발하고 침전할텐데, '생각'이라는 바람이 온통 휘젓고 다닌다. 시야는 뚜렷하질 못하다.



 선명하지 못하니, 목적지는커녕 어디 서 있는지 가늠되지 않는다. 어중간하게 떠있다. 그 '안개' 같은 것을 걷어내고자 다시 바람을 '후후' 분다. 겨우 가라앉은 것이 다시금 떠오르고 겨우 증발시키던 것이 다시금 내려 앉는다. 학습능력이 변변찮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다시 반복한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그것을 기록했다는 것이 아닐까.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면, 소설은 흥미로워진다고 하던가. 비록 '시련'이라는 과정을 겪어도, 나는 주인공이 되고, 극은 전반적으로 흥미로워진다.



 상황을 주어주면 상황을 맞이하는 한낱 '주인공'에 불과하지만, 소설은 일인칭 시점이다. 주인공이 글쓴이이고 허구 아닌 '논픽션'이다. 고로 시련은 독자에게 흥미로운 소재가 되고 극을 재밌게 만들지만, '글쓴이'의 의도에 따라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낼 수 있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선택은 좌절스럽게도 학습량 부족한 열등생의 오답 같은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고 있다. 실수와 실패는 성장의 발판이 되고 그것은 기록이 되어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더 강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어차피 모르고 푼 문제에서 '정답'보다는 '오답'이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찍은 문제를 우연히 맞아버렸을 때 상실하는 배움의 기회는 다음 '오답'의 가능성을 높인다.



 '박영서' 작가의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을 보면, 혼자 잘먹고 잘살겠다고 사기친 사람도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속섞이는 아이도, 먼저 죽은 배우자를 슬퍼하는 이도 수 백 년 전에 같은 결말을 맞이 했다. 시간 앞에 '권선징악', '생노병사', '호사다마', '일편단심', '인과응보', '새옹지마' 모든 것이 의미가 사라진다. 기준점이 터무니 없이 높아지면 모든 것은 평평해진다. 인류의 인구 증가를 나타내는 그래프는 80억을 기준으로 두면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주지만 250조를 기준으로 두면 1명일 때와 큰 차이 없는 일직선이 된다.



 우주선 보이저 1호가 지구에서 60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찍은 사진을 설명하면서 사용된 '창백한 푸른점'을 보면 그렇다. 전체로 보기에 나의 실수나 실패, 성공 이런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란 관찰자가 부여하기에 따라 생겨날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록하지 않으면 '행위'에 불과하지만, 기록하면 '역사'가 된다. 나의 하루는 관찰자를 상실한 행위일까. 의미를 지닌 무언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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