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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Feb 22. 2024

[생각] 가장 내가 하지 않을 것 같은 선택을 한다_운

 살면서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보겠어?

 20대 초반, 남들보다 군입대를 일찍 했다. 뭣 모를 때, 후딱 갔다오는 게 최고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만 열여덟에 입대했다.

 무엇도 배우고 나오지 못할 거라 장담했지만, 엄청난 것들을 배웠다. 개중 최고는 '글쓰기'였다. 운전병으로 근무하면 '운행대기'를 많이 한다. 보통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한 시간 내외로 운행을 하는데, 그외 대부분은 대기다. 이때 가장 많이 했던 건, '책읽기'었다. 책은 대중없이 읽었다. 얼마나 읽었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냥 짚이는 책을 읽었으며 인문학이나 교양서를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어느 날인가. 주말에도 홀로 근무를 하는 '1호차 운전병 동기'에게 간 적 있다. 주말에도 내무반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동기는 주말에도 근무하는데, 동기라고는 하나 있는 게, 어떻게 한 번도 안 올 수 있냐'는 핀잔을 몇 번 듣고 마음이 쓰여 갔던 것 같다.

 그때, 전후관계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동기는 자신의 스케줄표를 보여 주었다. 월간 스케줄러에는 빼곡하게 스케줄이 적혀 있었다. 아마 대대장님 운행 스케줄일 것이다. 그 스케줄러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제3의 시선으로 각인됐다.

 사람이 바뀌는 몇가지 포인트 중 하나였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분명 내가 그날, 그 스케줄을 본 것으로 나는 바뀌었다. 동기의 스케줄러를 보니, 짜임새 있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막상 그때마다 던져지는 일상을 겨우 살던 나와 달랐다. 그날 나는 외부 운행 중 문구점에서 '수첩'과 '볼펜'을 구매했다. 건빵 주머니에 들어가는 PD수첩이었는데, 앞장에는 월간 스케줄을 적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동기의 스케줄처럼 무언가로 가득 차길 바랐다. 주요 일과와 전역일, 입대일 등 몇 개의 일정을 적었다. 그러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더이상 적어 놓을 일정이 없었다. 그때 나는 흔히 말하는 '짬밥'으로 '꼬리곰탕'과 '군대리아' 메뉴가 언제 나오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라도 채워 넣었다. 그렇게 채우고 시간이 지났다. 수첩에는 아무 기록이나 넣기 시작했다.

'전역 후 먹어야 할 음식'

'전역 전에 읽은 책'

'전역 후 해야 할 일'

'전역하는 날, 나에게 쓰는 편지' 등

 스케줄러는 일기장이 됐고, 일기장은 단순히 하루를 기록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표도 쓰고, 보내지 않을 편지도 쓰고, 망상과 속마음, 누군가에 대한 비난할 것 없이 모두 적었다. 일을 완료하면 하나씩 지워 나갔고, '전역하는 날, 나에게 쓰는 편지'는 실제 '전역하는 날, 버스에서 읽어 보았다.

 전역 후 한 달 뒤의 나에게 쓰는 편지, 유학 간 이후 나에게 쓰는 편지 10년 뒤 나에게 쓰는 편지 등.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이런 저런 했던 이야기를 실제 그 시기가 되어 읽어 보았다.

 어느덧 스케줄을 짜는 일은 완전히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스캐줄은 처음에는 종이에만 기록하다가, 친한 동생의 권유로 인터넷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달력의 갯수는 둘, 셋, 넷, 다섯으로 늘어났고 기록한 스케줄은 수 년이 쌓여 있다.

 물론 유학시절에 기록한 일기를 비롯해, 수 년에 해당되는 일기를 분실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스케줄러와 일기장은 꾸준하게 쌓여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고 어느 시점에 읽은 나의 글은 '전혀' 새로운 누군가의 글처럼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한심하다 여기기도 하고, 때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남보다 더 모를 때도 있다. 그러고 보니, 꼭 '나'라고 여기는 것이 '남'보다 더 '남'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2012년에는 JYP에서 진행하는 오디션에 참가했다. 오디션은 수십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관객이 즉석에서 평가하고 심사위원이 이후 평가를 하는 형식이었다.

 첫번째 참가자가 나오고 노래를 불렀다.

'아... 이건 정면승부로 이길 수 없는 경쟁이겠구나.'

나는 준비한 노래를 대충 부르고 막춤과 MC와 농담 따먹기를 한 뒤, '인기상'을 받았다. 주최하는 것에서 2부 행사 MC를 봐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니, 이 내성적인 인간이 또 그 안에는 다른 녀석도 있는 모양이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내'가 '나'를 가장 모를 때, 그렇기에 나를 너무 잘 안다고 자부해서는 안된다. 꽤 많은 기록이 만들어낸 흔적들을 보건데, 나는 기본적으로 너무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어떤 기록을 더 채워내야 하는가, 그 고민은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보겠어'로 바뀌었다.

 기록을 남기자는 생각이 내가 하지 않을 것들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여전히 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면 하는 생각이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을 선택하자!"

나는 내성적이고 변화를 싫어한다. 고로 그런 내재성이 나의 본성이다. 그것이 그대로 그 시스템대로 작동되게 한다면 그것은 정해진 '숙명'을 따르는 것 처럼 느껴진다.

 고로 나는 '어떤 제안'이 오면 '그냥 해본다.' 언제 해보겠어.

누군가가 연락이 오면, 만나고 본다. 언제 만나보겠어.

이렇게 내가 하지 않을 것 같은 선택들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운명을 개척해 나간다는 똘기 가득한 성취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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