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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pr 05. 2024

[소설] 철학을 담은 조선시대 판타지 소설_금오신화


 김시습은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글을 읽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신동을 보고 주변 어른들은 '논어'의 글을 따서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이는 논어의 첫문장이며 그 의미는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논어를 읽지 않은 이들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따서 이름을 지었을 만큼 '시습'은 매우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어린 총명함이 어찌나 특출나던지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에 엄청난 벼슬을 하거나 대단한 치적을 남기진 않았다. 그의 나이 서른 넷 정도 됐을 때, 금오산 용장사에 들어 앉아 집필을 했는데 그때 지은 '소설'이 '금오신화'다. 금오산에서 집필한 단편 소설집으로 '신화'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배경'이 '현실'을 다루고 있지 않아서다. 과연 천재의 글 답게 이 글은 무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한때, '장르소설'이 폄하되는 시절이 있었다. 판타지, 과학공상, 무협, 추리소설 등의 장르소설은 순수문학에 비해 가볍게 쓰여지고 내용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보면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성경, 쿠란, 마오쩌둥 어록'을 제외하고나면 해리포터 시리즈,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다빈치 코드, 어린왕자 할 것 없이 대부분 판타지 소설이 그 순위를 차지한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 또한 판타지 소설이고,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 또한 판타지를 가미하고 있는가.



 '금오신화'는 총 다섯 개의 단편 소설이 엮어진 글이다. 사실 더 많은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는 다섯 개의 소설만 전해지고 있다. 이 소설은 '명나라'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를 흉내냈다.


 첫번째 소설은 만복사저포기로 시작한다.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갱'이라는 청년이 만복사라는 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데, 이들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왜구들의 침략 때 이미 죽은지 오래된 귀신이었다. 이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을, 이승과 저승을,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계유정난' 당시 왕위에 오른 '세조'를 지켜본 '김시습'의 일대기와 엮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작가의 의도가 어찌됐건 이는 독자의 몫이지 정답은 아니라고 본다.



 마치 J.K.롤링의 해리포터에 '20세기 사회가 갖고 있던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문제의식 고치'라는 거창한 수식을 달아 굳이 읽고 싶지 않도록 만들 이유가 없듯이 말이다. 소설은 소설로써 그 흥미를 주고 독자 개인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자유롭게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머글 태생 마법사'와 '순수 혈통'간의 차별이 현실 세계의 인종과 계급, 성차별에 대한 은유적인 비유'라고 굳이 '주석'을 달필요가 없는 것 처럼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금오신화'를 읽어도 그 안에서 독자는 충분히 다양한 사유거리를 느껴 볼 수 있다. 소설에는 현대의 뮤지컬처럼 주인공들이 '한시' 한 편을 서로 주고 받으며 읊는다.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이치'와 더불어 다양한 배움을 얻을 수도 있다. 


 '이생규장전'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이생'이라는 자가 '최랑'이라는 여인과 만나 사랑하는 내용이다. 이또한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사랑'과 '판타지'라는 현대에서도 흥행의 필수인 요소가 많아 흥미롭다. 다만 생각보다 쉽고 재밌는 이 '금오신화'를 실제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이름'과 '해석'이 주는 '장벽'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글'의 쓰임은 '읽힘'이고 그 쓰임 또한 '읽힘'이다. 읽히지 않는 글은 그 생명이 사라진다. 문학을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랜 고전에 다양한 각주를 달지만, 이러한 각주가 점차 글을 접하는데 장벽의 역할을 하며 때로는 그 본질을 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대가 지나면 점차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가 달라지면서 글에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전을 쓴 사람이라고 각 잡고 어려운 철학을 담아내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생각은 자칫 부담감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의 첫문장은 누가봐도 '판타지'다.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어떤 해석이 들어갈 여지 없이, 다음 문장을 읽어보고 싶은 강렬한 문구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흥미'를 느꼈지, 카프카가 던진 '사유'와 시대에 던진 '파편화'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후기'를 읽으며 '이렇게 잃힐 수도 있겠군'하고 생각 했을 뿐이다. 소설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향유하는 것이다. 공부하기 위해 꺼내든 학습지가 아니다.



 김영하 작가는 작품이 독자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일이지, 조각난 내용 속에서 답을 찾는 방식'으로 읽혀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 작가의 의도는 글이 읽히는 것이다. 감히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작가'가 오만하게 '선택'하는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면 누가 그 글을 읽고 사용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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