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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un 07. 2024

[수필] 느낄 感, 깨달을 覺. 헤아릴 勘, 새길 刻

 도서 제목,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참 마음에 드는 문구다. '느낄 감(感)'에 깨달을 각(覺).

다시 헤아릴 감(勘)에 새길 각(刻).

 각각 다르지만 음이 품을 수 있는 뜻이 참 좋다. 글을 읽는 행위는 실제로 독서의 일차적 행위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지 않는다면 독서는 흥미를 상실한다. 무조건 흥미가 있어야 한다. 흥미를 위해서는 '공부하는 마음'이라기 가볍게 헤아리고 느낀다고 여기는 것이 좋다. 쓸 때는 깨닫고 새긴다는 느낌으로 하는 것이 좋다.

 책은 누군가의 '씀'이다. '새겨져 있다. 깨달음으로 가득하다. 그것을 똑같이 새기고 깨닫는 것은 '레플리카'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의 느낌을 그대로 새겨 두는 것은 내것으로 만드는 행위와 전혀 반대다.

 나는 '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느끼고 헤아린다.' 이 과정에서 완전히 다른 조각이 형성된다. 그것을 깨닫고 새겨야 한다. 다른 이가 새겨 놓은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 소화기관에 놓고 잘근 잘근 씹고 다른 취식물과 혼합하여 새로운 무언가로 재창조 해야 한다.

 이것은 연결이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을 간 적 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짐을 푸는데, 주머니에서 딸려 나온 '조약돌' 하나가 있었다. 연결을 느꼈다.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다. 지구 탄생 후 45억 동안 '조약돌'은 이곳에 올 운명이 아니었다. 45억년 뒤, 내가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조약돌'의 운명은 결코 이곳으로 올 수 없다. 앞으로 지구가 존재 가능할 더 많은 시간 동안 그 돌은 그 자리에서 있어야 했다. 지구 형성 초기 심해 해저 화산 열수분출구에서 생명이 시작된 확률처럼 기적과 같이 그것이 내 주머니에 붙어 이곳까지 온 것이다. 비슷할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하찮지만 반면 모든 행위는 큰 의미가 된다. 내가 삼키고 소화한 흔적이다. 글도 그렇다. 읽기만 하고 배출하지 않으면 창조물은 존재할 수없다. 무존재를 존재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읽고 소화하여 배설하는 것으로 '창조적 행위'는 된다. 심지어 어제 먹은 잡곡이 소화기관을 타고 흘러 배수관을 넘어가더라도 행위마다 지구적 차원에서 창조적인 행위다.

 독후감은 창조적 행위로 만든 창조적 행위다. 캐플러 없이 뉴턴이 없고, 뉴턴 없이 아인슈타인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배설을 받아먹고 소화하여 배설하고 그 과정에 자신의 흔적을 아주 약간 묻혀가며 창조적 행위를 하고 있다.

 '김미옥 작가'의 '헬런켈러 평전'의 리뷰를 보며 느낀 바가 있다.

 꽤 온화하고 자비로운 중년의 여성일 것이라 생각한 셀러번 선생님이 헬런켈런을 만난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관계는 꼭 아름답게만 묘사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현실적인 관계 묘사도 분명 있다. 헬런 켈런 위인전을 읽은 어린 나이에 나는 대략 그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 대략의 지식으로 살아갔다. 대단한 사람들의 대단한 업적으로 치부한 거기에는 '반드시' 대단하다고만 할 수 없는 보통사람들이 마주할 지리한 노력이 있었다.

 골리기도 하고 심술이 나기도 하며, 포기하고 싶다가도, 다시 시작하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위인전'에는 모두 편집된다. 그녀의 '김미옥 작가'의 글은 잘 정제되어 나에게 왔고, 나를 자극했으며 나는 최근 '이북'을 통해 헬런 켈러를 다시 읽고 있다. 알지 못했던 숨겨진 비화가 엄청나게 많던 그 이야기를 내게로 선물한 것은 '헬런 켈러 평전' 그 자체가 아니라, 독후감이었다. 어쩌면 이 글 또한 누군가를 자극하여 어떤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 낼지 모른다. 고로 너무 각성하여 책을 읽는 것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읽는 것이 좋다. 우리는 달리기 할 때 보다 산책을 할 때 더 많은 꽃과 돌맹이를 보게 된다.

즉, 감으로 읽고 각으로 써야 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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