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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un 11. 2024

[심리] 가시 속 장미? 장미 속 가시?_우울과 불안을

 법정스님의 '무소유'에는 이런 말이 있다.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돋았구나'하고

누군가는 장미를 보며, '저 날카로운 가시에도 장미가 피는구나'한단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아닐지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것을 본다는 것.

 그냥 해골 바가지라도 '원효대사'에게 '깨달음의 날'을 줬고 누군가에게 '재수없는 날'을 줬을지 모른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빌게이츠의 말에 따르면, '삶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것을 받아 들어야 한다.' 그렇다. 시작은 '받아들임'에서 부터다. 인류 역사상, 단 한순간도 그 어떤 장소에서도 '평등'은 존재한 적 없다. 불가능한 것을 좆으면 자괴감만 커저간다.

 불평과 불만을 쌓는 것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카드 게임의 묘미는 블러핑으로 좋은 패의 상대를 이겨 냈을 때다. 단순히 운에 좌우되는 게 카드 놀이라면 참여자의 역할이란 관찰 밖에 없다.

 왜 사람들은 카드 놀이를 하는가. 그것은 거기에 불확실성이 있으며 우리에게 '좋은 카드'가 올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카드'만 선택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 나쁜 카드도 나올 수가 있다. 우리는 그 법칙을 이해하고 카드게임에 참여한다. 고로 나쁜 카드가 나왔을 때는 그냥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가난해서, 학력이 좋지 않아서, 남자라서, 아시아인이라서, 21세기에 태어나서... 크기를 막론하고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해서는 '열등감'만 쌓인다.

 '하루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실제 하루살이가 하루만 사는 것은 아니다. 대략 2~3일 정도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하루살이가 하루만 살거나 2~3일만 살거나 결과적으로 하루살이는 계절을 모르고 죽는다. 낮과 밤은 알 수 있으나, 그들은 계절을 모른다.

 우리도 그렇다. 알고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다만 대체로 우주가 이루고 있는 법칙은 크기와 상관없이 적용된다.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러첨 '모래알이든 바위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예외가 있다 해도 예외가 법칙이 될수는 없다. 작은 예외로 보편적 법칙을 모르쇠 할 수는 없다. 밤낮이 있다는 것은 여름과 겨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좋음과 나쁨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차가움과 뜨거움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를 보면 밤은 영원하지 않고 겨울은 영원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낮과 봄도 영원하지 않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점묘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작은 점을 찍어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다. 우리가 이 그림에 앉은 무당벌레라면 고작 보이는 것은 내가 앉은 작은 점과 양 옆에 놓여진 작은 점들 뿐이다. 다만 조금만 떨어져 바라보면 이 그림에는 다양한 색깔이 존재하고 점의 의미는 전체를 나타내는 작은 조각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기에는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너무 작은 것에 연연해하면 결국 전체를 놓친다. 이것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검정색 그리고 그 뒤에 검정색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검정색.

 그러나 그 검정색 점들 위로 올라가서 살펴보자면 전체 그림은 눈사람의 어느 부분일지 모른다.

'임아영 작가'의 '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작은 습관들'에서는 '초코파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사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정' 문화는 우리를 불안으로 몰았다.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 들어야 하는 우리 문화는 상대의 기분 알아 맞추기식으로 발전했다. 상사의 기분을 알아 맞추고 배우자나 자녀, 부모의 기분을 알아 맞춘다. 이것은 좋게 포장하기에 '정문화'이고 나쁘게 보기에 '눈치문화'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는 모호한 소통법으로 우리는 함께 있으면서도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불안해하며 상대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립과 외로움도 함께 느낀다. 결과적으로 모두는 비슷하다. 임아양 작가의 글을 보건데 우리는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으면 모두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그렇다. 고로 비극에서도 희극을 찾고, 불안 속에서 최소 고립될 필요는 없는 듯하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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