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한 친구를 알게 됐다. 이름은 'John'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했고 나보다 서너살은 많았다. 국적은 뉴질랜드 였으나 그는 대만계 출신이었다. 키가 작고 생머리에 피부는 하얗고 가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피부는 하얗다기 보다 투명했다.
John은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이곳 저곳을 다녔다. 오클랜드 대학교에 있는 잔디 정원에 누워 낮잠을 잤고 가끔은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엄청난 '육식꾼'인 나와 반대로 '채식주의자'였고 소식가였다. 한번은 Sal's Pizza에 방문했다. 어퍼퀸스트리트에 위치한 Sal's Pizza는 뉴욕식 피자를 파는 곳이었다. 거기서 존은 피자를 주문했다. '치즈피자 한 조각'과 '물'.
'한 조각?'
한 판은 시켜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John은 일단 한 조각을 먹으라고 했다. 치즈피자 한조각과 제로콜라. 이렇게 주문했다. 꽤 맛있는 식사였다. 배는 적당히 든든했다. 피자를 먹고 '알버트 공원'으로 갔다. 수백 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 그늘로 갔다. 나무 그늘에 앉았다. 적당히 배가 불렀고 존은 나를 보며 말했다.
자신은 언제나 정화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대만계라고 해도 결코 대만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뉴질랜드는 깨끗한 곳이며, 자신의 정화된 몸이 오염되는 것이 싫다고 했다. 그가 말한 '오염'은 일반적 '오염'이 아니었다. '정신적 공해'를 포함한 오염을 말했다. 시간이 나면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눈앞에 지나가는 '상'을 지켜 본다고 했다. 그것을 그저 바라 보라고 했다.
그때 아마 나의 나이가 스물 셋.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존은 지나가는 관경을 붙잡지 말고 따라가지도 말고 그냥 바라보라고 말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면 머리는 정화된다고 했다. 그 뒤로 무슨 말을 한참을 했는데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 행위는 자신의 '에너지'를 키운다고 했다. '에너지를 키운다.'
나이가 어렸던 나에게 '에너지'라던지 '상'이라는 말은 '사이비'스러웠다. 자꾸 그러한 주제로 빠지는 '존'에게 말장난을 하며 주제를 바꾸려 했다.
그때 왜 나는 그랬을까. 그의 말을 잘 귀 기울이고 들었어야 했다.
다시 상기시켜 보건데, 그의 말은 이랬다. 눈을 감고 자신의 상을 지켜보면 내부에 있는 에너지는 확신한다.
내부의 에너지, 그것은 자아.
외부의 에너지, 피부 밖의 에너지.
더 나아가 한 겹, 두 겹, 세 겹으로 에너지층이 넓어진다고 했다. 그때 첫번째, 에너지가 '자아'라는 것은 기억이 난다. 이 에너지층을 확산하여 가장 끝에는 '사랑'이라고 했던 부분도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몇 겹의 에너지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크리스천'이었고 그가 설명한 행위는 '메디테이션' 혹은 '마인드풀니스'로 불리는 명상이었다.
그 설명에 따르면 사람의 감정에는 차원이 존재한다. 1차원, 2차원, 3차원처럼 물리학에서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각 감정은 저마다 수준이 다르다. '제임스 앨런'의 '스스로 창조한 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마음이 걱정이라는 낮은 차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다시 마음을 끌고 와 평화와 힘의 영역으로 자신을 다시 세우십시오.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속에서 빛을 발하는 명확한 비전과 완전한 판단력으로 올바른 길과 그것으로부터 얻게 될 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목을 보는데 벌써 20년 가까이 된 인연이 떠올랐다. 걱정과 염려, 불안, 공포 이것은 차원 낮은 감정이다. 꾸준히 노력을 통해 우리는 자아의 차원을 높여야 한다. 이렇게 높아진 차원은 일시적으로 회기본능이 있어, 언제든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 디폴트값이 변경되기 전까지 꾸준한 노력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의 차원은 자꾸 저차원으로 돌아간다. 꾸준한 반복과 정화를 통해 우리가 고차원적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다면 앞서 말한 '회기본능'은 우리가 '저차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떠받는 요긴한 무기로 변신한다.
나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환경'이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환경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도 비몰아치는 환경과 포근하고 따뜻한 환경이 존재한다. 같은 환경에서 어째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남는가. 어쩌면 내부의 환경에 차이가 있어서는 아닐까. 쉽게 변화하는 내면의 노예가 되면 다른 사람들과 바깥 세계에 휘둘리게 된다. 확신에 찬 발걸음은 어떤 성취를 이루게 하고 어떤 성장을 가능하게하는 초월적인 능력이다.
누가 나를 만드는가. 밖에서는 외부적 환경이 있다면 안에서는 누구인가. 회사도 51%의 주식을 소유하면 지배력이 생긴다. 내가 나를 지배 한다면, 환경은 1%만 있어도 충분히 내편이 된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