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삶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있는데, 너무 사소하거나 당연해서 '주제'조차 삼지 않는 경우가 있다. 너무 일상적이라 말할 가치를 못느끼는 '주제'들 말이다. 가령, '입'으로 말을 한다던지, 코로 숨쉬는 것, 어떤 경우에는 눈을 감고 자야 하는 것처럼,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고, 대화 주제로 삼을 필요조차 없는 것들 말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이렇다.
손가락의 관절을 꺾어 '딱!' 소리를 들어야 직성이 풀린다거나, 아침 저녁으로 샤워를 두 번 한다던지, 어떤 경우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네모로 접어 놓는다는 행위들말이다.
모두가 다 그러고 있기 때문에 그닥 말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입으로 말하고, 코로 숨쉬는 것에 비해 확장된 것들에는 일부의 공감을 받고 일부는 공감하지 못한다. 당연한 거 아냐, 싶은 그 구간이 삶의 함정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이렇다.
매일 한편의 글을 쓴다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책을 본다거나, 콜라를 대량 주문해 놓고, 매식사마다 한잔의 콜라를 마셔야 하는 일.
혹은
하나의 음악을 반복재생해서 몇달, 몇년 간 플레이리스트에 한곡만 넣고 질릴 때까지 듣는 경우 말이다.
자, 어디서부터가 당연한 일상습관이고, 어디서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그 경계가 모호하지 않은가.
적어도 나의 삶에서 그 모호함은 아마 확장되기 첫 번째 단계에서 대부분의 사람과 달라졌으리라 여긴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마다 자신이 조금은 다를 수 있다고 여기면서 대체로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양자역학과 고전물리학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통일이론처럼 어디서부터가 당연한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당연하지 않은 것인지 그 경계는 모호하다.
이중 최근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책을 읽는다는 꽤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목차'를 살피는 이들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책을 읽을 때, '의식'이 있는데, 처음으로 '제목'을 보고, 다음으로 '출판사'를 살핀 뒤, 띠지를 떼어다가 옆구리에 끼워 넣는다. 여차하면 책갈피로 쓰고자해서 그렇다. 맨뒤에 추천사를 다음으로 읽고 날개에 적힌 저자를 살핀다. 이어서 목차를 살피면서 책의 방향과 분위기를 살피고 '들어가는 말'을 읽는다.
책을 읽을 때는 최소 한 챕터만 읽겠다고 마음먹는다. 다음으로 '87쪽'까지 읽기를 목표로 한다. 87년생이라서 그렇다. 그러다 100페이지까지 깔끔하게 읽겠다고 다짐한다. 다시 딱 절반 까지만 읽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깔금하게 200페이지에서 그만보겠다고 다짐한 후 완독해 버린다. 완독하면 '감사하는 말'을 읽고, 책 날개 뒷편에 비슷한 종류의 추천도서를 살핀다.
가장 마지막으로 바코드가 찍혀진 책의 뒷커버에 있는 가격을 살핀다.
'음... 1만 8천원, 그것보단 유익했군.'
그리고 책에 대한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잽싸게 블로그에 '키워드' 몇자를 적어두고 저장한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겼던 그 습관이 생각보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각보다 '목차'를 보지 않는 사람도 많고, 생각보다 출판사를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잉? 윌라오디오북 몰라?'
'응? 민음사를 모른다고?'
'엥? 어떻게 김훈 작가를 모를 수가 있어?'
뭐 이런 것들인데...
적어도 세상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 말이다. 그래서 대략 그게 뭔지를 설명하고 나면 뭔가 굉장히 이상한 걸 알고 있는 사람 취급을 받을 때가 있는데, 이쪽 입장에서는 상대가 하는 말이 도통 이해가 안될 때가 많다.
'연애남매 보셨어요?'
'장원영 모르세요?'
뭐 그런 종류의 것인데, 저쪽에서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상식을 모르는 표정을 내가 짓고 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어떤 집에서는 초등학생 아이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방에 들어가서 새벽 3시고, 4시까지 하게 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였는데, 우리집에서는 새벽 4시 50분에 아이가 혼자 일어나서 '책을 읽는다'라는 말이 워낙 거짓처럼 들릴 듯 했다.
얼마 전부터는 '미니멀리즘'에 꽂혀서, 차고 시계로 몽땅 다 처분해 버리고 완전히 가벼운 마음으로 무지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에 그것이 완전히 괴짜의 모습인듯 여겨지는 모양이다.
사람이 워낙 일상이 되서, 의식조차 되지 않는 무의식이 반복되면 그것이 커다란 격차를 만든다는데, 아마 나와 아무개는 이런 조건을 바탕으로 오늘도 격차를 벌리고 있는 듯 해 보인다.
원래 격투기나 스포츠를 즐겨보지진 않는데, 우연하게 알고리즘에 뜬 '유우성 선수'의 채널을 한참을 봤다. 평소 주먹 꽤 쓴다는 이들이 나와서 함께 스파링을 하는데, 아주 능숙하게 경기를 진행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참 멋있는 사람이 많구나.
그러게 진짜 겸손은 가식이 아니라 경외를 경험함으로써 느껴지는 것이고 겸손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를 낮춰서가 아니라, 이미 바라보는 방향이 '저 높은 곳들'까지 뻗혀 있다는 사실 같다.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사람은 서로 다르며, 그것이 우연한 기회에 살짝 엿보였으나,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이 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