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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Aug 01. 2024

[역사] 경제로 보는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세계적

 '일본은 명나라에 조공할 길이 열리지 않아 전쟁을 벌였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징비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면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는 실상 명나라를 정복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야망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일본이 조선침공에 대해 표면적인 이유가 그렇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부분인데, 아무렴 현대인의 입장에서 '조공'을 바치고 싶기에 전쟁을 벌인다는 명분이 납득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에 집중해야 한다. '조공을 받친다', '선물을 내린다', '책봉을 받는다', '책봉을 내린다'라는 언어에는 기본적으로 강력한 '상하관계'가 녹아져 있다. 이는 유교 사회에서 중요한 정리중 하나인데, 유교는 관계와 위치를 정의하고 정리하여 그에 맞는 언어사용을 몹시 중요하게 여긴다. 다만 이는 관계에 맞는 '상호예의'일 뿐이다.

 일본의 전쟁 명분은 '조공-책봉 체제'에 합류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즉, 명으로부터 책봉받고, 조공을 바치고자 전쟁을 벌였다. 얼핏 이해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언어를 다시 현대적인 의미로 정리해보자.

 과연 '조공'과 '책봉'이란 무엇인가.

동아시아에서 조공과 선물 교환은 중요한 외교적, 경제적 관행이었다.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조공-책봉 체제'는 주변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형성하게 했다. 고로 이는 외교적으로 안보적으로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현대 한미 동맹처럼 강력한 상호방호조약과 같다.

 일단 조공은 주변국이 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는 일이다. 이로써 황제는 자신의 우월성을 인정받고 권력을 과시한다. 다만 이는 일방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조선이 조공을 보내면, 명은 반드시 같은 양의 선물을 보내와야 했는데, 현대 우리식으로 보자면 '수출과 수입' 같은 개념이다. 다만 여기에 '정치적 의미'를 가진 '언어'가 심어져 있을 뿐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조선이 명나라에 너무 많은 조공을 보내자, 명나라가 이를 부담스러워 하며 조공의 양을 줄여줄 것을 요구한적 있다. 대체로 성종과 연산군 시기에 걸쳐 일어 났는데, 성종 10년인 1479년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조공이 너무 많아 감축을 요구 했다.

 '책봉' 또한 '상호 외교 승인 및 동맹 조약'이라 보면 쉽다. 쉽사리 명이 조선에 대한 파병요청만 부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 명나라 또한 여진과 몽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런 강력한 동아시아 군사 경제 동맹 체제에 합류하는 것은 당시 일본에도 중요한 일이었다.

 16세기 말,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 시대가 종식되고 통일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농업 생산량은 급격하게 증가 했는데, 농지 개간이 활발히 이뤄지고 사회가 안정화에 돌입되면서 쌀생산량이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에 토지 조사를 실시하고, 세금제도를 개혁한다. 이 과정에서 공급과잉 문제가 발생했고 쌀 가격이 하락하는 인플레이션이 생겨난다.

 과거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시기도 마찬가지다. 공급과잉은 인플레이션을 불러 일으키고 시장이 포화되면 쌀을 외부로 수출하거나 소비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역사에서 이런 경우에 전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은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은 수출을 통해 국내 쌀 가격을 안정시키고, 경제적 불균형을 해결하고자 모색했다. 19세기 영국이 청나라와 벌인 아편전쟁이 그렇고 세계 1,2차 대전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로, 이미 한나라 시기부터 5천만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 즉, '중국' 시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세계 최대 시장으로 주변국들은 이 시장을 열기 위해 간혹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다.

 이런 동아시아 정세에서 '임진왜란'이라는 필연적 전쟁이 발발했다. 임진왜란은 그 명칭이 '왜란'으로 불리기에 그 규모에 있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나 당시 삼국은 세계의 주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당시 중국의 인구는 1억, 조선의 인구 2천만, 일본의 인구 또한 2천만 정도였다. 경제규모와 군사규모도 인구와 비례하여 굉장했다. 조선과 일본의 인구는 같은 시기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던 강국 '프랑스'보다 많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당시 유럽은 막 중앙집권체제가 생겨나던 시기였고 명나라와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이 전쟁이 흥미로운 것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가히 세계대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의 수준급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각각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세 민족이 총력전으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조총이라는 유럽식 무기가 도입됐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폭격기격인 비차가 도입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대규모 해상전쟁과 스파이 활동 등의 정보 전쟁 등 다양한 계략과 영웅이 탄생하고 사라졌으며 그 결과 또한 세 국가의 운명을 명료하게 바꿨놨다.

 명나라의 경우, 조선에 파병한 군사적 부담감으로 급격한 국력 약화가 이어졌고 이후 '여진족'에 의해 멸망하는 직간접적 이유가 됐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면서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다. 비로소 일본도 히데요시가 죽고 에도막부가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면서 250년간 안정적인 정체 체제가 성립됐다. 조선은 이후 교육, 외교, 복지 등의 소프트파워에 대한 내실을 다졌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문서와 기록이 파괴되었는데, 이에 따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실용적인 문자의 사용이 필수적이었다. 전쟁 직후 조선은 사회복구와 재건을 위해 문맹 퇴치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한글이 법령이나, 명령서, 행정 문서 등의 실용 문서에 사용되기도 했다.

 여성과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한글 편지와 문서작성이 종종일어났으며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 한글 소설과 민중 문학이 발전하기도 했다. 또한 전후 100년간 농업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하여 전쟁 전보다 50%이상의 생산성 향상이 있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삼국지'나 '세계대전'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접할 수 있음에도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접할 기회는 없다. '명량, 노량, 한산' 등의 영화를 보면 각각의 인물이 특성이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적국의 인물을 악역으로, 아군의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지 않고, 삼국에 다양한 영웅이 생기고 사라졌다는 점에서, 또한 세 국가의 국운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뒤틀려 진행됐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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