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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Sep 03. 2024

[생각]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가장 쉬운 선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가장 쉬운 선택은 그것을 증오하는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



 오랜 습관 중 얼마간 '쉬고 있는 습관'이 있다.



'명상'이다.



 오래된 습관이라 말하기 꽤 민망하지만 커다란 상실을 겪고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시기에 얼치기로 시작한 습관이니 얼추 수 년은 된다.


 그것을 '정화작용'으로 생각하고 '치료법'으로 여겼으니, '이제 좀 괜찮다' 싶은 순간에 그것을 놓은 듯 하다.



 매년 Calm이라는 명상어플을 구독하여 듣다가, '코끼리 명상'으로 이어져왔다. '코끼리'에서 '나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는 간지러움을 즐기다가 언젠가부터 '독서'나 '명상', '글쓰기' 모두가 조금 느슨하게 숨만 붙어 있듯 존재감을 보였다.



 명상은 잠깐씩 숨고르기 정도로 명맥을 잇고 글쓰기는 휘갈려 쓰고 '독서'는 '병렬'도 아니고 '직렬'도 아닌, 모호한 방식이 됐다.



 이렇게 좋은 습관을 하나하나 놓치다보니 어느새 '본질'이 명확히 보였다.


'본질'이라함은 '게으름', '나태함'



시간의 치사량을 충분히 투입받는 일.



 어떠한 치열함도 없이 시간을 죽여, 겉으로 늙고 속으로 어려지는 가장 정도에 역행하는 순간을 보내는 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표정은 미간이 잔뜩 찡그려있고 말에는 독기가 서려 있다.



 기독교인은 아니다. 다만 필사적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마태복음 7장 3절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가.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고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남의 '티'를 지적하거든 '내 눈에 티가 있는지를 먼저 살펴라'


내가 흐리멍텅하니 남에 눈에 없는 것도 있다 보인다. 남이랑 같은 처지에 남을 지적할 것 못되고, 남을 지적하려면 '본인이나 정비하라'



 나에게 사도 마태오가 그렇게 말한다.



'디에고 리베라'라는 '멕시코 미술계 거장'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가장 쉬운 선택이 그것을 증오하는 것이라고 한단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본질적으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꾸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먹어보지 않은 버섯에 독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기 위해 수많은 생명이 그것을 먹고 죽었으며, 누군가는 그 위험을 알고 먹으며 누군가는 모르고 먹었다. 그렇게 모르던 것이 아는 것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용기나 무지가 필요한 법인데, 어쩌면 가장 쉬운 것은 '용기'를 갖는 것보다 '무지'한 편이다.



 모르면 용감하고, 모르면 속편하다. 모르면 희소식이고, 모르는 게 약이다. 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모른다' 정의하고 알고자 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그것을 모르는 채로 두고 그저 '증오'를 쌓아 둔다.



 그 증오가 입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내 속에 증오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내가 뱉은 것은 일부니, 속에는 얼마나 많은 그것이 남아 있겠는가.


 필터없는 직접흡연처럼 상대에게 일부가 전해진다면 나머지는 어디로 스며들고 있는가. 나는 나를 썪게 하고 그것은 썩어 주변을 오염시키고 그것은 나를 썩게하고 그것은 주변을 오염시킨다. 그렇게 오염원에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내 눈이 뿌옇다. 내가 보는 것은 그럼 옳은가.



가만히 스스로를 돌이켜 본다.


'명상'이라는 오래된 습관의 부재를 자각하고 다시 그것을 살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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