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위대하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다만 그것이 '한글'만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글은 위대하지만 한글만 위대하지는 않다. 한글은 수학 기호와 아라비아 숫자를 대체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F와 V의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도 못한다. '한글'이 위대하다는 것은 분명 '참'이지만 '한글만 위대하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우리는 '청동기'를 훨씬 지나왔지만 '기계산업', '전기산업',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청동'을 사용하고 있다. '주된 사용'이 무어냐를 묻기에 '돌은 아니다.'라고 답할 수 있으나, 더 좋은 것을 발견했다고 그것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한자는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인, 기원전 14세기에 처음 시작했다. 그 뒤로 2700년이 흐르고 한글이 만들어졌다. 한글의 발견은 혁명적이었으나 한글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한자'가 가진 장점이 분명하게 있다. 한자는 '명사화'하기 쉽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라는 말을 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또한 소통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범위에 따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제한된다. 즉 언어는 우리가 경험하고 사유하는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다. 언어가 발달할수록 우리의 사고나 세계관은 더 넓어진다. 즉 언어를 구성하는 '도구'를 많이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 '단어'다. 단어를 많이 하는 것을 우리는 '어휘력'이라고 부른다. 어휘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명사'다. 명사는 몹시 중요하다. 명사의 종류가 많을수록 언어 표현의 폭은 넓어진다. 명사는 사람, 사물, 개념 등을 나타내는데, 이런 명사가 세분화 될수록 정확한 표현이 가능하다. 가령 '동물'이라는 일반 명사는 '사자', '호랑이', '고양이' 등의 더 세분화된 명사로 나눠진다. 다시 '고양이'는 '페르시안', '샴', '스핑크스' 등으로 나눠진다. 즉 더 다양한 명사를 알수록 더 명확하고 풍부한 표현이 가능하다.
이처럼 명사의 종류가 많을수록 생각을 더 세밀하게 구분하고 전달할 수 있다.
'포유류가 서 있다' 보다는 '고양이가 서 있다'가 훨씬 더 명확한 전달이 가능하고 그보다는 '스핑크스 고양이가 서 있다'가 훨씬 더 정확한 의미 전달을 가능하도록 한다.
한자는 '명사화'하기 굉장히 유리한 문자다. 우리는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표현을 '표리부동'이라는 명사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일단 한 개념을 명사화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언어에서 모든 명사는 동사화 될 수 있다.
'컴퓨터'는 '컴퓨터하다.'
'구글'은 '구글하다.'
'축구'는 '축구하다.'
등으로 사용된다.
다시 모든 동사는 형용사화 가능하다.
'구글하는', '축구하는', '컴퓨터하는' 처럼 말이다. 다시 이렇게 형용사화 된 표현은 부사화 할 수 있다. '구글하도록', '축구하기 위해서', '컴퓨터스럽게'처럼 밀이다.
즉 '표리부동'은 '표리부동하다'가 되고, '표리부동한', '표리부동하게' 등으로 무한히 넓어진다.
인간의 지식은 '분류'로 넓어진다. 물리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학은 '분류학'에 가깝고 대상은 분류하여 세밀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과학'이 발생했다. 고로 언어에서 '명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3000년 간 '한자'로 명명하여 언어화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자'를 모르는 것은 우리 언어를 좁히는 것이고 이는 세계를 좁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혹자는 한자를 보고 '중국문자'라고 말하며 사용하기를 기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아라비아 숫자'나 '알파벳', '수학기호' 등에는 조용하다. 유독 일본어와 한자에만 극성인 것은 역사적 열등감일지 모른다.
일단 한자는 '중국의 문자'가 아니다. 일단 '중국'은 '영토중심 역사관'을 갖고 있다. 다시말해서 현 중국의 영토 내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는 '민족중심 역사관'이다. 영토와 상관없이 민족이 중심이 되어 어떤 역사를 겪었는지를 말한다. 이 역사관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큰 갈등을 빚기도 하는데, 중국 역사관을 중심으로 보면 고구려는 중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역사이니 중국 역사이고, 우리 역사관을 중심으로 보면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겪은 역사이니 한민족 역이다. 이는 역사를 기준하는 방법에 대한 차이일 뿐이다.
고로 중국의 역사관을 기준으로 볼 때, 한자는 중국 내에서 발생했기에 중국의 문자이지만 우리의 역사관으로 볼 때, 한자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사용했기에 우리의 문자이기도 하다. 이는 '고구려의 역사'를 보는 중국과 한국의 차이처럼 볼 수도 있다.
'문자'는 사실상 '국적'이 없다. 얼마 전, '누나'와 '오빠'라는 단어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등록됐다. 이제 '누나'와 '오빠'는 '한국어'이기도 하지만 '영어'이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는 '문화'에 '국적'을 달곤 한다. '초밥'은 어느 나라 음식인가. '햄버거는 어느나라 음식인가', '김치는 어느 나라 음식인가'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굉장히 구분하기 어려운 특성을 갖고 있다. 쌀밥 위에 날생산을 올려 먹은 최초의 사람을 찾는 것, 빵과 빵 사이에 햄을 넣어 먹은 최초의 사람을 찾는 것, 발효된 채소에 매운 양념을 무쳐 먹은 최초의 사람을 찾는 것이 음식의 기원이 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이는 단순히 어느 곳에서 대중성을 가졌느냐의 문제이지, 최초의 문제를 따지고 드는 것은 굉장히 비생산적인 일이다. 어쨌건 우리는 일반적으로 초밥은 일본, 김치는 한국, 햄버거는 미국을 떠올린다. 그 음식이 그 나라에서 대중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자'는 어떤가. 한자는 물론 '중국'에서 가장 대중적이지만 이는 동아시아에서 공유하는 문화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 일본이 사용하는 한자는 각기 다르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개발하여 사용됐다. 즉 한자와 중국은 상관관계는 있지만 그것이 한자의 정체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자의 정체성은 우리쪽에 충분하게 들어있다.
다시말해서 한자를 공부하고 사용하는 것은 매우 우리를 잘 알 수 있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