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공'을 쥐어줬다. 이후 '빈통'이 덩그라니 있는 방에 두는 실험을 했다. 놀랍게도 실험 참가자들 대부분은 누구의 지시도 없이 쥐어진 '공'을 '빈통'에 던져 넣었다.
본래 사피엔스는 '없는 의미'을 만들어내는 '의미 창조자'다. '인지혁명 이후, 원시 사회는 보이지 않는 힘과 영적인 세계를 연결해주는 '샤먼'을 만들어 냈다. 본래 의미가 없던 자연헌상이나 사건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질서를 만들었다. 이런 '인지 혁명'의 장점이라면 스스로 공동체 범위를 키울 수 있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인지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언어와 상징, 허구적인 개념을 발달시켜 공동체를 확장하게 했다고 말이다. 인지혁명은 단순한 정보 뿐만 아니라 허구나 상상의 개념을 공유하도록 도왔다. 이는 더 큰 규모의 사회를 이루는 기반이 됐다.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믿으며, '국가', '신화', '종교'를 만들어내고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었다.
그렇다. 실험 참가자는 없던 규칙을 만들어 '공'을 '빈통'에 넣느냐, 못 넣느냐로 성공과 실패를 구분했다. 누구도 지시한 적 없던 '놀이'를 만들어내며 스스로 '성공'이나 '실패'를 규정하고, '성장'이라는 개념도 만들어냈다.
그러나 우리가 방에 들어간 '공 넣지 못한 참가자'라면 어떻겠는가. 애초에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실패는 '아무런 의미'조차 갖지 않는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 창조하고 거기서 자신만의 규칙을 행한다. 누군가는 공을 빈통에 집어 넣는 게임을 했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냥 공을 바닥에 튕길 수 있으며, 어떤 누군가는 아예 게임을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누구도 빈 방에 들어갈 때, 무엇을 하라는 지시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어떤 지시를 받고 왔는가.
단연컨데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빈공을 들고 빈통 앞에 서 있는 그저 '의미 창조자'일 뿐이다.
고로 '빈공'을 넣는 게임을 즐기고 싶다면 넣으면 그만이고, 그 게임에서 실력을 성장하고 싶다면 성장하면 그만이다.
반대로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우리는 이곳에 올 때, 아무런 간섭없이 홀몸으로 왔다. 심지어 기저귀 한장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공과 빈통이라는 '유도'조차 있지 않다.
우리는 각자 주어진 상황에 스스로 게임을 창조하고 만든다. 고로 빈공간에 빈시간이 주어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
열심히 하거나 말거나, 성공하거나 말거나, 실패하거나 말거나,
재밌게 하는 게 좋다.
하기로 했으면 열심히 해보는 것,
하지 않기로 했으면 그저 하지 않는 것,
가기로 했으면 그저 가는 것,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그저 게임의 규칙을 바꿔 보는 것
그 뿐이다.
내가 나온 방에 다른 참가자가 어떤 게임을 만들고 거기서 성공을 하던지, 말던지 중요치 않다.
그러나 게임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그것이 본래 '주어진 천명'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늘' 입장에서 억울한 노릇이지 않겠는가.
그것이 전부이고 방에 들어간 이유라고 알게 되면 그 공간과 시간은 얼마나 고통으로 가득 차겠는가.
고로 우리가 빈공을 쥐고 빈공간에 빈시간을 부여받고, 빈통 앞에 서 있는 의미조차 비어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는다면 사실, 그 뒤에 그 비워있는 것들에는 자신만의 의미를 채워 넣으면 그만이다.
돈을 벌고 싶으면, 돈을 버는 게임을 즐기고
공부를 잘하고 싶으면, 공부를 잘해보는 게임을 즐기고
매순간 의미와 목표를 부여하고 달성해보는 게임을 즐기면 그만이다.
고로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게임을 창조하고 즐기는 '게이머'들인지 모른다.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규칙에 좌절하며 생을 소모하는데..,
모두는 '삶'이라는 빈 시공간을 채우는 '창조자'들이라고
그저 주어진 시공간을 스스로 정한 규칙과 목적에 맞춰 즐기면 되는 '게이머'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