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번만 살 수 있다는 건, 전혀 살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말이다.
문장만 떼어 보면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한 번을 사는 것과 전혀 살아 보지 않은 것이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그 속에 담아져 있는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대비 되는 개념을 말하고자 했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니체는 동일한 사건과 삶이 무한히 반복한다고 생각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영원회귀'를 언급했는데 지금이 무한히 반복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견딜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니체는 삶이 영원히 반복했을 때, 기꺼이 우리는 그 반복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가를 물었다. 즉, 영원회귀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풀어 본 문제를 다시 푸는 것은 정답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단, 우리는 한번의 삶 밖에 살 수가 없다. 즉 행동에 대한 결과를 다시 경험할 수 없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상황이 반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삶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수정할 수도 없는 의미다.
어떤 선택과 삶이던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삶'이 옳았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검증할 기준 자체가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무게라는 것은 무척 가볍다. 정답 없는 문제지를 받아 들었을 때, 우리는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차피 정답이 없기에 그냥 아무 숫자나 '찍'하고 써놓고 낮잠이나 자면 된다.
선택과 경험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가볍다. 가볍다 못해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즉, 오직 한번만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무게감이 없다는 의미다. 아예 살지 않음과 같다. 정답 없는 문제지에 아무 숫자나 그어놓고 '문제를 풀었다'라고 답할 수 있을까. '애초에 문제를 풀지 않음'과 '문제를 풀음'의 의미는 없어진다.
이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삶이라도 무언가 기대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나는 무엇에 기대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아마 '책'이지 않을까 싶다. 책은 읽으면 여러 번의 간접 경험을 하게 된다. 비교대상이 생긴다는 것은 나름 기준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기준은 평가할 수 있다. 고로 '삶'에 '의미'가 부여된다.
가만 본래 삶의 본질이 '무한히 가볍고 무의미 하기 때문에 비록 나의 '해답'이 '정답'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괜찮다. 기준이라는 것 또한 '간접' 경험이기에 결국 다른 간접 경험을 채워 넣어 기준을 바꿀 수 있다는 역설이 생긴다.
보는 책을 달리하거나 경험하는 세상을 달리하면 그만이다. 즉 삶은 의미가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하면 부여되지 않고, 부여하기로 하면 부여되는 그런 속성일 뿐이다. 나는 그 방향키를 '책'으로 설정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