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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May 14. 2021

[D-99] 배부른 소리 & 한국이 좋다!

 그다지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식사를 줄이니 나른하고 피곤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식사를 줄인 것도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먹는 정도보다 약간 적은 양을 먹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정도의 식사를 하고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양이다. 얼마 전, 유튜브로 탈북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옥수수밥을 고슬 고슬고슬하게 퍼서 무절임과 먹는 이야기를 했다. 그마저 옆사람과 비교하며 먹는다는 이야기를 보고 새삼 나의 하루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먹을 수 있지만 참는 것과 아무리 먹고 싶지만 먹지 못하는 것에는 분명 배곪음이라는 공통사가 있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다. 타의에 의해서 하지 못하는 것과 자의에 의해서 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나의 삶의 모토처럼 '주체적인 삶'에도 분명 반대된다.

 나의 의지로 한 끼 식사를 조절하고 거를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감사한 일이다. 주체적으로 '배 곪음'을 선택하는 것은 타의에 의해 먹지 못하는 굶주림과 표면적으로만 비슷할 뿐 원초적으로 다르다. 나는 어쩌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였던가. 살면서 어른들에게 배우던 예절 중 큰 비중을 치지 하던 범절은 '밥상 앞'에서였다. '몸 흔들지 말고 먹어라', '소리 내지 말고 먹어라', '남기지 마라', '투정하지 마라', '젓가락과 수저는 함께 쥐지 말아', '숟가락을 엎어 놓지 말아' 등. 왜 그렇게 어른들은 식탁 앞에서는 고지식하신지 사촌네 집을 놀러 가면 밥 먹는 동안, TV를 틀지 못하게 하시기도 했다. 음식이 흔해지고 저렴해진 시대를 살면서 감사함이 줄어들었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가 없었다.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는 배차시간도 한참이 긴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가서 내가 항상 좋아했던 건 '감자튀김'이었다. 짭조름한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 먹으면 너무 맛있었다. 나는 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감자튀김을 먹은 건 손에 꼽을 만큼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군대를 전역하고는 유학을 갔다. 우연히 '클럽&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아침에 보이는 '버거킹'에서 나는 햄버거를 시켰다. 그리고 감자튀김을 먹었다. 그리고 해외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약속도 생겨가면서 학교 급식과 군대 짬밥 그리고 엄마가 해준 집밥이 아닌 외식 음식들을 접하게 됐다. 보통의 한국 친구들과는 다르게 나는 한국인 인맥이 많지 않았다. 대게 외국인 친구들이 많았던 편이라 나의 식성 또한 굉장히 편향적으로 길들여졌다. 

 유학을 마치고 취업을 했을 때, 그곳에서는 거의 매일 피자와 햄버거, 치킨을 먹고살았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거나 그것이 맛있다. 혹은 맛없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일 끝나면 함께 일하던 형과 드라이브 스루로 햄버거 세트를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방으로 가져가 혼자 한국 예능 프로를 돌려보며 먹었다. 식사 시간이라는 것이 딱히 있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 누구와 이야기하는 것도 없었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대충 케밥과 콜라로 때우고 저녁에는 돌아가면서 어김없이 햄버거였다. 그런 기간이 수년이 흘렀다. 근 10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식사에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도 어색했고 식사를 즐길 줄 몰랐고 밥상 예의도 생각지 않았다. 무엇을 먹느냐도 중요하지 않았다. 항상 그렇게 살았던 듯 혼자서 먼 거리를 돌아 정크푸드를 영상을 보거나 책을 보면서 먹었다.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듯하다.

 가끔 해외에서 생활하던 시기가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는 걱정도 없고 고민도 없었다. 그저 눈을 뜨면 정시 출근하고 정시 퇴근해서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저녁에는 코로나 맥주를 들고 숙소 옥상에서 별이나 보는 하루를 보냈다. 가끔 그때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한국에 온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식습관을 가지고 내 아이들을 대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식사에 대한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자라며 클 것이고 그것은 크게 보자면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감사함을 잊어버리는 기만과도 같다. 따뜻한 한 끼 식사라면 그리고 대화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이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은 나 또한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씩 식습관을 고쳐나갈 것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르게 해야 할 것이다. 자세를 고쳐 앉지 않으면 좋지 못한 자세는 굳어져 버린다. 지금이라도 삶을 대하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아야겠다. 

 어제는 10시 45분에 운동을 시작했다. 한 시간을 빠른 걸음과 달리기를 하고 나니 밤 11시 45분이 되었다. 예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뛰어다니면서 했던 것 같은데, 움직이지 않는 러닝머신에서 5분만 뛰어도 숨이 차오른다. 얼마나 망가져 있던 걸까. 반성하고 반성한다. 예전의 모습으로 차근차근 돌아갈 예정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항상 자신감 있고 하는 일마다 술술 하고 풀렸다. 선택에 걱정이 없었다. 고민도 없었다. 지금은 한 살 한 살이 달라지며 그때의 나로부터 멀리 와 가는 듯하다. 비록 2일 차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지속하여 예전의 모습을 되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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