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날들을 좋았던 날들로 독후감
우음수성유, 사음수성독.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생명을 살리는 소의 젖과 생명을 앗아가는 뱀의 독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물을 마시고 만들어진다. 어떤 것 받아들이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같은 말을 듣더라도 불 같이 화내는 사람이 있고 '허허'하고 웃고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 같은 상황을 겪더러다도 한 평생 상처로 간직하는 사람이 있고 다음 삶의 영양분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물을 들이마신 소와 뱀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는 '물'의 문제가 아니라 삼켜낸 이가 어떻게 뱉어내느냐의 문제다. '불교'나 '기독교', '천주교'의 '성언'들은 고귀한 말로 포장됐지만 '긍정적인 삶'이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내주고 5리를 가자면 기꺼이 10리를 가주는 것은 불쾌하게 보자면 한 없이 불쾌해질 만한 일을 기꺼이 더 내어줌으로 상대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의 감정을 빚지게 해주는 행위다.
오늘의 우리의 하루는 좋은 날이 었을까? 나쁜 날이 었을까? 뱀과 소가 먹은 물과 같이, '날'이라는 것은 과연 독과 양분 중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그저 '주어진 날'을 어떻게 삼키고 있고 어떻게 뱉고 있는가. 새로운 차, 새로운 직장, 새로운 머리스타일 그것은 과연 좋은 양분인 것일까? 그것을 삼키더라도 독을 만들어 내고 있을 수 있고 죽음, 이별, 사고는 과연 나쁜 양분인 것일까? 그것을 삼키더라도 양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모든 일에 불평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과 모든 일에 감사해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인생을 삼키면서 '독'과 '양분' 중 한쪽을 극명하게 쌓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내부에 존재한다. '선'과 '악'도, '좋음'과 '나쁨'도, '성공'과 '실패'도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대부분의 관념적인 '양과' '음'은 모두 내부에 존재하고 이 경계는 분명하지 않으며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삶에 있어서 '본질'을 찾는 것 자체도 무의미 하지만, 굳이 찾아본다면 '무탈'하고 '행복한 삶'일 것이다. '왜 그 행동을 지속하느냐?'라는 질문을 꼬리를 묻고 올라가다보면 완전한 본질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까워 질 수는 있다. 어느 날, 매일과 같이 야근하는 한 사람에게 물었다.
"왜 일을 그렇게 많이 하세요?" 그는 대답했다.
"돈 벌어야죠",
"돈은 왜 버시나요?"
다음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그래야 아이들 옷도 사주고 해야 하니까요."
"아이들 옷을 사주는 건 왜 해야하나요?"
"그래야 아이들이 행복해지니까요". "
"그럼 아이들이 아빠가 일하지 않는게 행복하다면 일을 그만 두실 건가요?"
"그건 안돼죠.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니까요."
이 질문에 첫 질문은 '돈을 왜 벌어야 하는가'이다. 마지막 질문에 남자가 한 대답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일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남자는 '일을 왜 하느냐'라는 질문에 최초의 대답을 내놨을까?' 아마도 본질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돈을 버는 목적은 다양하다. 아이들 옷도 사줘야 하지만, 여름에는 좋은 곳에 여행을 가기도 해야하고 친구들과 맥주 한 잔도 해야하며 양가 부모님께 선물도 드리고 번듯하게 살고 있다는 생색도 내야 할 것이다. 표면적으로 빚춰지는 사회적 지위도 필요하고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대답은 여러 이유 중 가장 먼저 포기 가능한 대답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질문에 꼬리에 꼬리를 물며 올라가다보면 결국 '무'의 상태에 도달한다. 아무것에도 이유는 없다. 단지, 흐름에 맞는 현상에 행위를 지속할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애매하게 넘나들며 시간을 보내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최초에 자신의 본질을 찾아 고민해봤던 '싯다르타'는 모든 것은 '부질'하다고 판단했다. 불교에서는 이를 '공'으로 보고 도교에서는 이를 '무'라고 봤으며, 양자역학에서는 이를 '중첩상태'로 정의 했다. 모든 것은 존재하기도하면서 부재하기도 하고, 행복이면서 불행이기도 하다. 삶의 의미에 심각하게 고민하다보면 때로 삶의 무의미에 허탈함을 느끼고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사실 삶이란 본질을 찾아 해맬 이유는 없다. 삶이란 그저 이유없이 주어져 있으며 시간을 보내는 행위일 뿐이다. 거기를 채워가는 과정에 굳이 '독'으로 채워갈 이유는 없다.
우리는 어차피 채워야 할 할당량의 인생이라는 '그릇'을 부여 받았다. 비워지는 경우없이 꾸준하게 채워야만 한다면 굳이 독과 양분 중 독을 가득 채울 필요는 없다. 가끔 바보같은 이론인 '조삼모사'처럼 아침에 세 개냐, 저녁에 네 개냐는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몫이다. 우리는 아득 바득 저녁에 4개를 받기 위해 살아간다. 사실 우리가 받을 총 량이 7개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4개를 저녁에 받기 위해 발악한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마시멜로 이론에 따라 만족지연을 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이야기가 유행하곤 했다. 분명하게 주어진다는 약속이 보장된 무한한 마시멜로와는 다르게 우리 인생은 한정적이며 어떠한 약속도 보장되어 있지 않다.
'욜로'처럼 저녁에 주어질 3개까지 모두 아침에 받아가라는 무책임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보장된 7개에 부담을 내려놓을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또한 '행복'과 '불행'은 제로섬 처럼 한정적 자원은 아니다. 무한대로 주어지는 이 같은 양분을 굳이 저녁에 받기 위해 아침에 아껴 쓸 필요는 없다.
책은 다소 불교적인 성격을 띄고 있지만 나는 복잡하게 이뤄진 '천상계'의 신의 존재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으로의 불교는 우리 인생에서 분명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예수의 말씀과 부처의 말씀이 '종교'의 옷을 입고 편견에 사로잡힌다는 건 인류 전체로 봤을 때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은 종교에 관계없이 철학으로 접근하여 꼭 한번 읽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