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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당신은 착하지 않습니다_인간의 품성

by 오인환

'착하다'의 함정은 언제나 우리를 따라 다닌다. 과연 어릴 때 부터 듣고 자란 '탁하다'는 '선'과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우리가 하는 '선'은 '이기심'과 완전히 독립적인가. 우리는 얼마나 선량한가. '알고보면 착하다'라는 말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지내는 친구와 가족, 지인들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인가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까. 나도 모르게 5살 아이를 키우면서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아이고! 착하네' 별 뜻없이 하던 이 말버릇에는 대단히 좋지 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스스로 치우거나, 심부름을 잘할 때 부모의 나는 아이에게 '착하다'라는 말을 자주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을 부모에게 적용한다면 어딘가 어색하다. '아버지, 착하시네요' 혹은 '어머니 착하시네요'라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착하다'가 갖고 있는 어감은 사전적 의미로 정확히 묘사하긴 어렵지만 위에서 아래로의 칭찬이라는 점은 사용하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이것은 '도덕'과 '선'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선하게 생기셨어요'라는 어감에는 생김새가 모나지 않을 듯 하고 둥글둥글할 것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게 '쓴소리' 못하고 설령 누군가로부터 비합리적인 대우를 받더라도 군소리 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말한다. '착하다'와 '선하다'는 사전적 의미로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방어'를 하지 못하고 언제든 '막 대해도 괜찮은 사람' 정도의 어감을 갖는 것은 이 용어가 갖고 있는 원초적 의미를 넘어 실제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이 그렇다. 과연 '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교정기관을 막 출소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내부에는 '억울하게 들어온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사법기관의 판단 실수로 억울하게 형을 받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서로를 '알고보면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 착할까. 혹은 반대로 어떤 형을 받고 난 이들, 즉 범죄자나 범법자들은 정말로 '악'한 사람일까.

나의 고정관념이 확실하게 깨주었던 소설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가 그렇다. 살인자의 동생이 일본사회를 살아가며 겪는 '살인자 가족'으로써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세상에는 정말 '쳐 죽여야 속이 시원할 범법자들'이 많다. 그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을 그들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그럴법도 하네'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것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사실 의미가 없다. '기부포비아'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사건들이 있었다. 선한 얼굴로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던 이들에게 마찬가지 선한 동조의 마음들은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얼마 뒤, '선'의 이름으로 행해지던 '악'들이 세상에 알려진 뒤, '선해보이던 그 얼굴'에서 사람들은 악마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그의 얼굴은 선한 얼굴이었을까. 악한 얼굴이었을까. 그의 행동은 선했을까. 악했을까. 선과 악은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당골 소재다. 이처럼 수 천 년 간 현자들이 고민해 온 철학 문제를 책 한 권 읽었다고 이해했다 할 수는 없다.

다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선의 상징'인 예수와 '배신자의 상징'인 유다가 결국 같은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보자면 '선과 악'은 분리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마음 먹먹한 어느 가을 날, 문뜩 그 낙엽이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떨어지는 낙엽에는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다. 그저 자연의 이치대로 나뭇가지에 매달렸다가 적당한 시간에 떨어져 내려지는 현상일 뿐이다. 이 낙엽을 보고도 누군가는 '아~아름다운 가을 이구나'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저 떨어지는 낙엽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지는구나'를 느낀다. 여기서 낙엽의 역할은 무엇일까.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성'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선'을 보고 '악'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고, '악'을 보고 '선'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마치, 애호박부침을 보면서 '맛있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맛없겠다.'라고 생각하는 두 부류가 존재하는 것처럼 선과 악은 그 대상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에게 존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명확한 기준점은 없으나, 누구에게나 권하고, 누구에게나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이런 '선'이라는 용어를 이용하면 다른 누군가를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쓰레기 좀 버려줄래?' 아이에게 말한다. 아이가 쓰레기를 버린다. '아이고! 우리 아이 착하구나.'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이뤄진 명령과 복종은 비단 아이에게만 이어져 있지 않다. 이렇게 자란 법의 테두리 밖에서 해서는 안되는 일과 해야 되는 '도덕의 영역'에서 '질서'가 존재한다. 이런 질서는 법처럼 객관적이지 않고 바라보는 이의 주관에 철저하게 달라진다. '악'이라고 바라보는 관점과 '선'이라고 바라보는 관점 중 다수결에 의해서 '악'과 '선'이 나눠진다. 다만, 피사체 자체는 그저 '존재'일 뿐, 악도 아니오 선도 아닌 상태가 된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일은 어찌보면 철저히 '상대적이며', 절대 다수의 가치관에 맞추는 일은 아닐까 생각한다.

유학하던 시기, 나는 '헤이즐넛 초콜렛'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지금 찐 살의 가장 큰 원인이던 그 초콜렛을 함께 살던 플랫메이트의 몫도 함께 샀었다. 초콜렛 하나의 가격은 꽤 비쌌다. 정말 큰 맘 먹어야 2개를 살 수 있는 고급 초콜렛을 나는 무리하며 그의 방 앞에 항상 두었다. 그리고 2달을 지낸 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초콜렛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까지, 나는 초콜렛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의 가치가 그 쪽으로 가서는 값어치가 적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취향'이라는 것은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초콜렛이 맛있어야 하는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가 초콜렛을 좋아하긴 쉽지 않다. 반대로 학창 시절 내가 가장 싫어하던 반찬은 '가지무침'이었다. 학교 급식에서 억지로 다 먹어야 급식실 밖으로 통과를 시켜주던 이상한 교칙 덕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 가지 무침이 나오는 날이면 한바탕 오바이트를 하고 교실로 돌아 가곤 했다.

영양사 선생님이 가지 무침이 건강이 얼마나 좋고, 그 말캉 말캉한 식감을 아무리 설명해 줘도 도무지 흐물흐물하고 미끄덩거니는 가지무침이 잘 넘어가지지 않았다. 당시 트라우마 때문인지, 나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 가지무침을 먹어본 적이 없다. '선과 악'이란 그런 개념과도 같다. 맛있는 음식이 왜 맛이 없냐고 취향이 다른 이들에게 물어봐야 의미가 없다. 흡연자에게 왜 담배를 피우냐고 묻는 것은 비흡연자에게 왜 담배를 피우지 않느냐고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우리는 각자 개인만의 모호한 잣대를 가지고 세상과 사람을 판단한다. 그 잣대는 스스로에게 절대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또한 자기 자신과 친구, 가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 잣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이들은 당연히 자기 친구와 가족들이다. 조금 살아가다보면 마치 자신이 정답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가르치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기껏해봐야 100년도 살지 못한다. 많아봐야 50살도 차이나지 않는 서로가 서로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미안마에서 100년을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국에서 30년 산 사람이 보고 겪었던 일들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없다. 1만년을 먼저 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20대가 말하는 '어플 개발'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스마트폰 어플 개발로 돈을 벌겠다는 젊은이에게 노인은 야단 칠지도 모른다. '젊은놈이 땀흘려 돈 벌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게을러 터져서 어디에 쓰겠누!', 이 노인의 조언에 따르면, '페이스북'과 '에어비엠비', '우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조금 더 알 것이라는 오만과 착각으로 상대에게 함부로 조언을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인생은 당신이 생각한 것 보다 더 다양하고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모든 이들이 가치관이 따로 존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관점을 항상 갖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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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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