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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 15분의 기적

명상을 꾸준히 한 댓가로 좋은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마라

by 오인환

심장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뛰듯, 우리의 뇌 또한 의지와 관계없이 작동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을 제어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심장이 천천히 뛰어라', '심장이 지금은 조금 빠르게 뛰어라'와 같이 우리의 생각 또한 임의로 조절할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엄청나게 많은 감정과 생각은 우리 머릿속을 제멋대로 떠 다닌다. 맑은 물 속에 온갖 부유물과 침전물들이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못하고 소용돌이 치는 물속에서 섞인다. 물을 혼탁하게 만든다. 물속에서는 제 아무리 좋은 수경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목표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누구의 머릿속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에게는 침전물과 부유물이 존재한다. 원래 깨끗한 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두가 혼탁한 물 속에서 흐릿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물살이 잔잔한 이와 세찬이는 같은 부유물과 침전물을 갖고 있더라도 혼탁함의 차이가 크다. 출렁임이 큰 물결을 잔잔하게 만드는 일을 정기기적으로 해주지 않는다면 침천물은 가라앉지 않고 부유물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명상이 하는 역할은 그렇다.


명상의 방법은 많다. '마음챙김'과 '명상'그리고 '명시'가 있다. 몸과 의식을 '바로 지금'에 집중하는 '마음챙김'은 쉴 새 없이 과거를 되돌아보거나 미래를 예견해보는 습관을 버리게 돕는다. 모든 의식을 현실에 집중함으로써 지나간 일과 일어나지 않는 망상을 걷어내는 작업이 바로 '마음챙김'이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제대로 된 '뇌휴식'을 얻고 마지막으로 깨끗해진 머릿속을 통해 '명시'의 단계로 넘어감으로써 스스로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목표를 분명하게 하며 원하는 것에 접근해 간다는 것을 상상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에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다. 이런 다양한 방법의 수행을 '명상'의 부류로 부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상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뒤 꼿꼿한 자세에서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오므리는 '수행자의 명상'을 떠올린다. 명상이란 '자세'가 본질이 아니다. 혼탁한 물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차분하게 내부를 관찰하는 일에는 등을 꼿꼿이 피거나 가부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리를 꼬우고 있어도 좋고 등을 기대고 있어도 좋다. 우리는 '명상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 '삶을 잘 사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본질을 놓치고 겉치레를 흉내내는 것에는 지속성이 생기기 어렵다.


우리의 뇌는 매우 복잡하게 작동된다. 온갓 감정과 잡생각이 떠다닌다. 이것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명상이 아니다. 떠다닌는 것을 그저 바라보며 그것의 꼬리를 잡지 않고 마음껏 떠다니다가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명상이다. 우리가 명상을 해야하는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도 있지만 커다란 삶의 변화를 기대하기 때문도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부? 명예? 행복? 그 무엇이던 좋다. 우리가 어떤 것을 원할 때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에너지를 거기에 소모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오른손으로는 수학문제를 풀고 왼발로는 축구공을 튀기며 머리를 세차게 흔드는 동시에 왼손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이처럼 멀티테스킹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뇌의 작동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원하는 목표와 꿈에 도달하기 위해선 갖고 있는 에너지를 그 방향으로 초집중하여 활용해야 한다. 차분하게 손과 발, 머리를 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명상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의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위협을 느낀 도마뱀은 왜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언제나 최선을 향해 설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최후의 순간에 어쩔 수 없는 '차악'을 택하는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다. 목숨을 잃느니 자신의 꼬리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차악은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발생하는 독성'과도 같다. 우리가 야수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체내에 엄청난 독성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마치 야수에게 '나는 맛이 없는 고기입니다. 독성이 있지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스트레스가 인체에 좋지 못하다는 연구결과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차악의 선택으로 스스로 독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우리는 야수들의 위협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신체는 언제나 환경보다 변화가 느린 법이다. 우리가 스트레스를 잘 해소해 주지 않는다면 내부에서 발생한 독성은 우리를 노화시키고 병들게 만든다. 명상을 습관화 하는 사람들의 신체 나이가 훨씬 젊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와 꿈은 집중케어가 필요하다. 주인의 에너지를 고스란하게 받아도 달성하기 힘든 것이 목표와 꿈이라는 꽃이다. 여기에 줘야 할 물을 굳이 걷다리에 들이 부을 필요는 없다. '잡초가 아니라 꽃에 물을 줘라'라는 표현 처럼 명상이란 자신이 물을 줘야할 목표물을 분명하게 하게 그곳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도록 돕는다. 여기에는 커다란 소모가 필요없다. 하루 15분, 2회의 명상법으로 우리는 더 쉽게 빠르게 꿈과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과학적으로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런 뇌의 활동으로 우리에게는 이유를 모를 '행운'이라는 것이 찾아오게 된다. 우리가 잊고 있던 의식과 감각에 기민해지며 스스로가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유도되는 것이다. 이런 15분, 하루 2회는 얼핏 지키기 쉬워보이지만 그렇진 않다. 때문에 변호사와의 상담이나 중요한 사업가와의 점심 약속처럼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일정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이 반이나 있다는 말과 물이 반 밖에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한다. 같은 상황이라도 분명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상황이 된다.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들은 '왜 이런일이 나를 위해 생기는걸까?'하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작동은 마치 모든 일이 나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만들어 진다고 확신을 준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은 독실하게 신을 믿는 경우가 더러 있다. 신이 인도하는 긍정적인 설계가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확신은 우리의 '뇌'를 성공에 기민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력권 중심에 서있다. 우리는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어 내며 우리 환경을 빚춘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조금 종교적인 어휘일 수도 있지만, 명상은 의식을 확장시킨다. 자아를 단단하게 만드는 명상이라는 수행은 감각을 기민하게 만든다. 주변 환경에 기민해지고 타인에 대한 관대함이 생긴다. 타인과 자신을 일치시 한다. 이 의식의 확장은 인간과 인간을 넘어 인류로 확장되고 자연계로 확장된다. 그리고 우주로 퍼져 나간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쉽게 타인을 이해하며 타인에게 매력있는 사람으로 어필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에 기민하다. 이런 '이타성'은 '이기적'인 다수에게 주목받기 쉽다. 이것은 영향력을 발전한다. 요즘처럼 인플루언서가 힘이 되는 시대에는 적당한 이기성과 관대한 이타성이 성공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던,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부유물과 침전물도 가라앉지 않은 물 속에서 흐릿한 시야를 갖고 목표물을 향해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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