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독후감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3보 전진, 2보 후퇴'다. 고양이의 눈으로 본 인간이라면, 우리가 하고 있는 충분한 성찰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환경, 테러, 기아 등의 문제를 눈 앞에 있으면서 전혀 나아지는 감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어쩌면 아둔하다는 것일 지도 모른다. '애완'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고양이'를 대한다. '애완동물'의 사전적의미를 살펴보면, 인간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기르는 동물이다. 이처럼 인간 중심적인 정의를 두고 있다. 다만 어느 부분에 언급했던 고양이의 생각을 살펴보자면 조금은 다르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스스로 완전하고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인간이지만 사실 다른 동물들의 눈에 인간은 우리가 바라보는 기타 동물과 같이 하등하고 열등한 동물일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새로운 시각을 준다. 각종 이슈로 논란이 됐던 황교익 작가는 대중들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꾸준히 하는 이유에 대해 '불편하더라도 새로운 생각들을 꾸준히 만들어주는 일도 글쟁이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의 다른 이야기에 공감하던, 하지 않던의 문제를 떠나 그가 말한 '글쟁이의 추구 목적' 자체에는 동의한다.
독자와 대중에게 꾸준하게 새로운 생각을 던저주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대중이 모두 옳다고 하는 일에 의심의 지점을 던져 넣는 일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에 공감하는 이야기만 던져주는 일은 대중의 인기를 얻을 지언정 세상을 획일되고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 몰아간다. 독서의 목적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차원을 여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책은 '사실확인'이 분명하다는 전제에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은 언제나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항상 제3으로 넘기는 일을 좋아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또다른 소설이다. 소설의 도입에 고양이와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개와 인간의 역사란 많은 방식으로 접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고양이와 인간의 역사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도, 궁금해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소설의 소재에 흥미를 느껴 재미로 읽었던 책에서 새로운 시각에 대한 접근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 고양이는 개 만큼이나 중요한 동물이었다. 개는 인간을 위해 경계 근무를 서며 외부의 적 침입을 막는데 유용했다. 반면, 고양이는 개와 반대로 내부의 침입자를 막는데 이용됐다. 5000년 전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농사를 지어 거둔 농작물이 쥐에 의해 훼손되자, 쥐를 쫒는 야생고양이를 들여 농산물을 지키도록 했다. 다음 수확을 위해 준비한 '씨'까지 먹어버리는 쥐라는 내부의 녀석을 경계하기 위해선 고양이는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우리 인간은 밖으로는 '개', 안으로는 '고양이'를 키우며 외부와 내부의 적을 막는데 커다란 도움을 받는다. 1300년대 유럽에 흑사병이 유행한다. 당시 고양이를 흉물로 생각하던 가톨릭교회는 고양이가 이 병을 퍼트리고 다닌다는 마녀 사냥을 시작한다. 사실 쥐에서 시작한 이 질병에 천적인 고양이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자, 흑사병은 1348년 부터 1352년까지 5년간 유럽의 인구 절반을 죽게 했다. 이 잘못된 선택 때문에 유럽 인구가 급격하게 줄자, 교회가 권력을 잃기 시작하고 인간을 탐구하는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렸다. 또한 봉건제가 몰락하고 사회, 경제, 종교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며 후에는 인클로저 현상과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역사가 급격하게 바뀌어 나간다.
예전, 하얀색 암코양이를 키웠던 적이 있다. 원래 '개'를 좋아하는 성격이던 내가 처음으로 키웠던 고양이다. 동물학자들이 말하는 지능 지수를 살펴보면 '개'는 항상 '고양이'보다 지능이 높다고 나온다. 직접 키워 본 고양이는 좀 더 '인간스러웠다.'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는 개보다 훨씬 더 감정의 폭이 넓어 보였다. 우리는 직접 키워주는 부모님과도 가끔 마찰이 일어나곤 한다.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 분명하게 존재하며, 자유 의사에 따라 함께 하고 싶을 때와 그러고 싶지 않을 때가 존재한다. 언제나 나를 보면 반기는 '개'는 어딘가 영혼없이, '어서오세요'라고 말하는 키오스크 기계의 인사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쩌면 나는 인간보다 고양이에 더 공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다움과 인간성이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다른 동물들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