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연' 작가 님의 글, '미안해, 실수로 널 쏟았아'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의 결핍이 그녀를 가득 채우게 했다는 글. 대게 그렇다. 자신이 부하였을 때 겪었던 불편함을 상사가 됐을때 대물림 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에게 결핍했던 것은 자기 자녀에게 물리려 하지 않는다. 6.25를 겪고 가난과 배우지 못한 설움에 부모는 차후 자녀들에게 가난과 무지를 대물림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략 그런 관계다. 부모는 자신이 결핍하다 느끼는 부분을 충분하게 채워주지만 자신이 충족했던 부분에 소흘해진다. 부모는 자신이 갖지 못한 부분을 채워 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식은 자신이 충족되지 못한 부분을 기억한다. 서로의 기억이 다르다.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부딪칠 수 밖에 없다. 이 관계에 기대 갖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고통이 된다. 닭은 갓 태어난 알을 품고 병아리를 키우지만, 새끼가 중병아리가 되면 부모의 연이 끊어진다. 자신의 밥그릇을 탐하면 부리로 쫒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강아지도 일정 나이가 되면 성견 대 성견으로 대립의 관계가 된다. 부모자식의 인연이 끊어지면 인간은 쓸쓸함을 느끼지만 이외 자연의 모든 동식물들은 관계정리를 깔끔하게 한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널 위해 어떻게 살았는데...'와 '도대체 날 위해 해준 게 뭔데...'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갈등이 되는 시기를 맞이 하던가. 칼처럼 관계정리를 통해 자녀의 지위를 동등한 성인으로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관계 중 '법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는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니다. 우리는 '친구' 관계를 법적으로 보장하지 않지만, 부모, 자식, 형제, 부부, 친척... 그 모든 관계 중 자연에 존재하는 유일한 관계는 친구 관계일 뿐이다. 언제든 떼어날 수 있는 아픈 살이 될 것을 알면서 이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육아라고 본다. 매년 이른 봄이 되고 입춘이 갓 지나고 나면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로쇠에는 당분과 철, 마그네슘, 망간, 비타민A,B,C가 풍부하다. 이런 풍부한 수액은 나무의 상처를 통해 얻을 수 있다. 나무에 상처를 내지 않고 이 양분을 얻어가는 방법은 없다. 나무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나무 껍질과 속에 지워지지 않을 깊숙한 구멍을 내어서 수액을 뽑아간다. 고로쇠의 수액을 뽑아가면 고로쇠 나무는 겉으로 멀쩡해 보이지만 나무 위로 올라갔어야 할 수액이 오르지 못하며 나뭇가지를 자라고 새 눈을 티우지 못하게 한다.
나무 겉에는 잘 보이지 않는 조그만 구멍만 남아 있지만, 나무의 성장에는 치명적인 내부 상처를 입는 샘이다. 그리고 나무는 성장을 멈춘다. 부모가 되는 길은 어쩌면 그런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자녀로써 부모에게 작은 상처를 냈지만 속에 있는 양분을 모두 앗아가진 않았을까. 아이들과 재밌게 놀고 집으로 돌아오니 도무지 알 수 없이 기진맥진 상태가된다. 내가 충분하게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기엔 돌이켜 보기엔 그다지 그 시간에 충분하진 않았다. 풍선을 사달라는, 여기를 가고 싶다는,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모두 모른척하고 아이가 혼자 놀기를 속으로 기대하며 시간을 때우고 오지는 않았는가. 분명 어쩐지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기력이 쇠하다. 가는 길에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를 부르고 둘이 티격 태격을 하고 고자질을 한다. 머릿속에 이미 떠다니는 부유물을 천진한 아이들이 손바닥으로 휘젓는 듯 복잡했다. 지금 잠을 자지 않으면 뽀로로 테마파크에는 가지 않겠다고 반협박을 하고 아이를 재운다. 같은 말을 대략 열 번 정도 반복하고 화가 묻은 목소리를 내뱉자. 아이들은 입고 있던 털조끼로 눈을 가리고 잠에 들었다. 도착하고 10분 정도 아이들이 깨어나지 않았다. 바로 내리지 않고 아이들이 더 자도록 내버려 둔다. 챙겨 온 책을 수 십 장 넘긴다.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잠투정을 한다. 정신없는 틈으로 매표를 하고 입장한다. 내가 어린시절에도 동물원이나 기타 놀이공원을 갔던 기억이 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억에 나진 않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를 내시던 모습은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던 이유와 같을 것이다. 나에게 남은 기억에는 화를 내시는 모습만 있을뿐 내 모습은 지워져있다. 신나게 논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화를 내셨던 모습은 잊고 놀았던 듯하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에게 화를 냈던 건 하루 종이 머릿속에 떠다닌다. 아마 우리 부모님도 그러셨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 나는 부모님께 질문을 했다. 생각해보니 그 질문은 아이들이 내게 자주하는 질문이다.
"아빠! 왜 달 님이 자꾸 따라와요?"
이 질문에 우리 아버지는 '너무 멀리 있어서 따라오는 것 처럼 보이는 거야'라고 하셨다. 나는 아이들에게 '하율이, 다율이가 좋아서 따라오는 거야'라고 답한다. 이 질문은 1회가 아니라 2회, 3회, 4회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이 질문에 '아빠가 좋아서 따라오는 거야'라고 장난섞어 답했다. 아이들은 '아빠도 좋지만, 하율이 다율이가 좋아서도 오는거야' 하고 소리친다.
어떤 교육이 맞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것들이 서른이 넘고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어제처럼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교육하셨지만, 지금의 나이에도 가끔 아버지의 대답이 정답이 되어 나를 교육할 때가 있다. 가끔 너무 멀리 있으면, 아무리 멀리 벗어나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관계도 그렇다. 앞서 말한 법이 정한 부자연스러운 모든 관계가 그렇다. 너무 멀리 있으면... 때로 가까이에서 지켜주는 느낌이 들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