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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Dec 11. 2021

[생각] 운명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고등학교에서 '백호기'라는 '청소년 축구대회'가 있었다. '백호기'에서는 '축구'만큼 유명한 것이 '응원단'이다. 하얀 교복셔츠 위로 검은 응원복을 입는다. 응원복의 전면은 파란색이지만 뒷 면은 노란색이다. 모두가 응원복 닫고 있으면 파란색이지만 일부는 응원복을 활짝 열어 교복셔츠를 보인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림과 글들은 이렇게 표현된다. 각자 학생은 번호가 부여된다. 번호된 부여마다 어느 시점에 뒤를 돌아야 할지, 응원복을 열어야 할지 정해진다. 축구단을 위해 응원가를 부른다. 응원가의 가사와 박자에 맞게 누군가는 응원복을 펼치고 누군가는 '뒤돌아섯'을 하고, 누군가는 응원복을 닫는다. 노래가 빨라지고 복잡해져도 상관없다. 내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양의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박자에 맞춰, 응원복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뒤돌았다가를 반복한다. '유튜브'에 '백호기 응원'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희안한 응원 영상은 이렇게 완성된다. 여기서 오래 전, 이 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댓글을 달았다. '공부해야 할 아이들을 얼마나 훈련시키면 저런 북한에서 볼 법한 동작이 될까.'. 물론 연습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엄청난 연습량으로 학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그저 마치 노래에 율동을 넣는 듯, 간단한 서너 동작을 박자에 맞춰 반복할 뿐이다.



 '열고, 닫고, 돌고, 앉고', '열고, 닫고, 열고, 닫고' 내가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주어진 동작을 취할 뿐이다. 학생 대부분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응원임에도 어떤 모양이 완성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체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엄청나게 쪼개진 픽셀이 존재한다. 각자의 픽셀은 그것이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독일의 세계적인 문호 괴테는 25세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썼다. 극 중에서 '샤르로테'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베르테르라는 남성이 약혼한 '샤르로테'에게 반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글을 읽은 롯데의 신격호 회장은 당시 문학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하고 그는 자신의 철학을 담은 회사의 이름에 이 이름을 사용한다. 샤르로테(샤롯데)는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거대기업 '롯데'의 어원이 됐다. 괴테는 25세에 자신이 쓴 문학작품의 이름이 훗날 한국과 일본에서 거대기업의 이름으로 활용될지 알고 있었을까. '롯데'라는 이름은 1988년 신격호 회장을 세계 4위 부자 순위에 올려 놓기도 했다.



 나비효과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아주 작은 어떤 선택이 크게 비화되는 것을 말한다. 가령 과거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우범곤 순경' 사건이 그렇다. 1982년 95명을 연속으로 살해나 부상을 입히고 스스로 자살하여 비교적 최근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단 기간에 죽인 인물로 남겨졌던 그의 범죄는 사실 배 위에 앉은 파리 한 마리에서 부터 시작했다. 낮잠을 자고 있는 우 순경이 낮잠을 자던 사이, 그의 가슴에는 파리 한 한마리가 앉는다. 그리고 그의 동거녀는 파리를 잡기 위해 그의 가슴을 때린다. 이 후, 사건은 하루종일 일어났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류탄과 총기 난사를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당시 내무부 장관이 사퇴한다. 당시 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된지 한 달 정도된 이가 공석이 된 내무부장관 후임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그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얼마 뒤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노태우 대통령이다. 운명은 어떻게 작동되는가. 마치 픽셀 하나를 들여다 볼 때는 임의로 깜빡거리는 형상일 뿐이지만, 운명 전체에서 그 픽셀은 필연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나는 운명론을 믿지 않는다. 정해진 전체의 큰 틀에서 내가 하는 역할이 그저 깜빡거리는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어느정도 진행되고 뒤를 돌아보면 인생은 희안하게도 전체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명확하진 않지만 분명 어떻게든, 전체가 모양을 갖추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극사실주의 화가의 작품 것과 다르다. 일종의 현대미술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바와 같다. 어떤 상황에 어떤 방식으로 누가, 어떻게 봤는지에 따라 한 그림이 정확히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한다. 세상은 정해진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물들은 원자핵을 돌고 있는 전자로 이뤄져 있다. 다만, 원자핵과 전자의 사이에는 원자핵과 전자보다 훨씬 광활한 '여백'이 존재한다. 결국 어떤 물체건 사실상 '빈 공간'일 뿐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색깔은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빛의 파장일 뿐이다. 인간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화학물질을 이용한 전기작용의 하나이며 운명이란 수치화 할 수 없는 여러 사건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만들어내는 진행일 뿐이다. 사람이 보기에 따라 '절대자'가 존재하기에 어쩌면 '누군가의 설계'일 수도 있다. 설계자는 다만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기에 지극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다. 결국 설계가 존재하더라도, 하지 않더라도 운명은 이미 쓰여진 각본이 아니며, 하나의 작은 사건과 사건이 점차 비화되고 확대되는 과정이 여러차례 겹치며 만들어내는 일종의 불규칙 하면서 규칙적인 화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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