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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Jan 17. 2022

[생각] 신라 동쪽의 식인종 왕국 이야기로 본

단 한 권의 책이 무서운 이유_인플루언서 글쓰기 정지중(D-19)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당서에는, 신라가 동쪽으로 장인(長人)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인(長人)이라는 것은 키가 세 길이며 톱날 이빨과 갈고리 손톱으로 사람을 잡아먹으므로 신라에서는 항상 활쏘는 군사 수 천 명을 주둔시켜 수비하였다."

 여기서 '길'이란 사람 키의 단위를 말하며 8~10자 정도를 말한다. 길이 단위는 현대의 미터법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최소 단위로 변환한다고 해도 5~6m는 된다. 송나라에서 편찬한 당나라 역사책인 '신당서'는 1044년부터 1060년까지 17년에 걸쳐 완성한 정사다. 이는 중국 정사 '24사' 중 하나다. 여기에서 신라에 대한 지리적 설명은 이렇다.

"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다. 횡으로는 1천 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長人)에 대치하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이며, 북쪽은 고려와 접해있다." 이처럼 장인(長人)은 신라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신당서에서 장인(長人)에 대한 표현은 계속 이어진다. 

"장인(長人)은 그 키가 거의 세 길이나 되고 톱니 이빨에 갈퀴 손톱을 갖고 있다. 털이 온몸을 덮고 있다.화식(火食)을 하지 아니하여 새나 짐승을 날로 물어 뜯으며 간혹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또한 부인을 얻으면 의복을 만들게 한다. 그 나라의 산은 수 십 리 씩 연결되어 있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 관문이라 한다. 신라는 항상 쇠뇌를 쏘는 병사 수 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

 해당 자료를 본 사람들은 이 장인(長人)이 신라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우산국(울릉도)'라고 여기기도 하지만 장인(長人)에 대한 설명을 다시 보자면 '그 나라의 산이 수 십 리 씩 연결되어 있고, 신라의 병사 수 천이, 이 장인(長人)에 대치하기 위해 주둔되어 있어야 했으므로 해상이 아닌 내륙 인접한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런 장인에 관련한 글은 '유양잡조'라는 당나라 책에서도 발견된다. 그 곳의 내용은 앞서 말한 '신당서'나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기문'이라는 책에서 말하길, 신라국은 동남쪽으로 일본과 가깝고 장인국과 인접해 있다. 장인국은 사람의 키가 3장이나 되고 톱 같은 이에 갈고리 같은 손톱을 하고 있다.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짐승을 사냥하고 때로는 사람도 먹는다. 그들은 벌거벗고 사는데, 검은 털이 온 몸을 덮고 있다. 나라의 경계는 수 천 리에 걸쳐 산이 이어져 있으며 중간에 있는 골짜기는 철문으로 봉쇄되어 있다. 그것을 '철관'이라고 부른다. 항상 수 천의 궁수가 그곳을 지키게 하고 있기 때문에 통과할 수 없다. "

 '당나라 헌종' 때, 조정에서 '위요'라는 이를 신라국에 사신으로 보내 어린 임금을 책립하려고 했다. 당시의 '위요'는 나이가 많아 그 일을 맡기 힘들어 했다. 하여 신라를 다녀온 적 있는 빈객에게 신라로 가는 여정을 물었다. 그러자 빈객이 했던 말은 앞서 말한 여러 서적의 이야기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신라, 일본 양쪽으로 모두 사신을 보냈었습니다. 당시 우리 사신단은 신라에 도착한 뒤,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배를 갈아 탔는데, 수 일간 그치지 않고 파도가 심하게 쳤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신단은 파도를 따라 표류하게 됐고, 우리 100여 명의 사신단은 배에서 내려 해안가로 갔습니다. 그러자 거기에는 무려 2장(4~6m)이나 되는 키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중 비교적 포동포동한 이들 50여명을 골라서 밖으로 빼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삶아 먹고 술에 취해 골아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도망쳐 우리와 같은 당나라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남자들을 잡아먹고, 여자들에게 의복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이런 신기한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다른 기록에는 거인국에서 도망치다가 그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손가락을 잘랐더니 손가락 하나가 몽둥이만하고 이를 국가에 받쳤다는 내용도 있다. 왜 이렇게 모든 이야기가 일관적으로 '장인국'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실제로 고려사를 보면 '우산국(울릉도)가 여진의 침략으로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됐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여진족 해적들에게 우산국이 침략을 당하고 백성들이 살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 백성들을 우산국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포기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실제 일본 남부 지방에서도 여진 해적에 대한 기록이 적잖게 발견된다. 큐슈 지역에서는 여진족 해적을 막기 위한 제사를 지낼 정도였다. 당시의 기술로 보자면 북쪽 대륙에 위치한 여진족이 일본까지 내려가기 위해선 중간병참지가 있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여진족은 퉁구스 계의 종족 집단으로 만주 일부 지방에서 거주 했으며 말갈계의 후손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을 보자면 항상 하체 부분만 가리고 옷을 모두 벗고 다녔으며 거처가 일정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만 명이 넘으면 대적할 수 없다', '이들이 셋이면 호랑이를 잡는다.'고 할만큼 전투적인 민족이었다. 그럼 여기서 나의 추론을 이어간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는 '야인'이라는 종족이 있었다. 압록강 이북에 살았던 중국 소수 민족으로 여진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1900년때 중반 까지 중국 산골에서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다. 그들의 생김새는 일반인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고 알려졌다. 우리의 기록 뿐만 아니라, 중국 동화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종족으로 묘사 되곤 했다. 다만 실제 그들은 그런 풍속을 갖진 않았다. 앞서 말한 장인족의 기록들은 대부분 '태평광기'라는 책에서 인용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야인족'과 상당수 일치한다. '태평광기'라는 책은 '정서'가 아니라, '민당집'이자 '설화집'이다. 

 이 '태평광기'는 '유양잡조'와 '기문'에서 차용했는데 이들 또한 설화를 담고 있는 책이다. 기록은 서로가 인용하고 차용하지만 설화나 민담을 담은 정서에서 한번 차용하고 나면, 이 이야기는 정서를 '출처'로 삼아 다시 서로 인용하며 이것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책을 읽다보면, 여기 저기서 마치 진실인 것처럼 인용하고 차용하는 글들을 보게 된다. 이것에 의문을 가진 다른 책에서는 이것의 오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즉, 만약 단, 한 권의 책을 읽게 되면 오류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고 무비판적 수용의 자세로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이다. 꾸준하게 읽은 책에 대한 비판적 의식과 더불어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지식을 조금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사용하게 하는 방법이다. 앞서 말한 '신라 식인종'의 이야기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단지 나의 추론일 뿐이다. 다만, 나는 실제 신라에 5~6m의 거인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것이 진실이고 아니고를 떠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르면, 기골이 장대한 중국 소수 민족의 해적이 동해안으로 들어와 일본과 신라를 약탈해 가면서 태백산맥의 어느 부분에 중간병참을 건설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설화가 극적으로 변환하여 민담에 실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책과 책은 서로 인용하고 차용한다. 원출처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고 오류를 가지고 오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게 벌어진다. 이는 철두철미해야 할 '과학분야'에서 조차 벌어짐으로 다양한 독서를 통한 시선을 확장하고 그것을 통해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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